일반적으로 인간의 집단을 사회라 하고, 동물의 집단을 군집이라 한다. 그러면서 사회는 목적의식적으로 이끌어가는 집단을 의미하고, 군집은 본능적으로 무리를 지어 사는 것을 의미한다고 구분 짓고 있다. 따라서 우리는 인간의 사회가 동물의 군집보다 우위를 점하고 있는 것이 무엇인가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인간과 동물은 본능적으로 혼자 사는 것보다는 무리를 지어 사는 것이 자신이나 종족을 위해 유리하다는 것을 잘 알고 있다. 그러나 인간의 사회는 구성원들의 관계를 형성하는데 이성으로 본능을 조절하는 장치가 있지만, 동물은 예나 지금이나 그저 본능적으로 무리를 지어 살 뿐이다.
그런데 인류의 역사에는 사회를 유지하는 집단이성이 특정집단과 여론의 휩쓸려 혼란을 겪었던 적이 있었다. 이른바 무차별적인 처벌과 맹목적인 법의 집행만을 전부처럼 여겼던 사람들의 만행으로 기록된 중세의 마녀사냥이 바로 그것이다. 결국 그 결과는 어떻게 되었던가? 이것은 <레 미제라블>의 시대적 배경에도 고스란히 반영되어 있다. 혁명의 소용돌이 속에서 이성적인 판단보다 집단여론에 휩쓸려 복수와 보복이 난무하던 시절에 어떤 사회를 건설하는 것이 인간의 몫인지 생각해 보게 하는 과제를 던진 책이 바로 <레 미제라블>인 것이다.
이쯤에서 우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실현하고자 했던 자베르 형사와 ‘원수를 사랑하라’는 예수의 가르침을 실현하고자 했던 미리엘 신부의 행동에 대해서 좀더 이성적으로 분석해 볼 필요가 있다. 앞에서 밝혔듯이 가장 이상적인 사회를 건설하는 것은 자베르 형사와 미리엘 신부의 신념이 조화를 이루게 하는 것이다. 한 집안에 엄한 부모만 있는 것보다는 부모가 각자 엄한 역할과 자애로운 역할을 분담해서 양육하는 것이 아이를 올바르게 키울 수 있는 것과 마찬가지다. 그러나 사회는 가족보다 더 복잡한 문제를 안고 있어서 그리 호락호락하지가 않다. 결국 사회를 이끌어가는 정책을 집행하기 위해서는 어느 한 쪽에 우선순위를 두는 선택을 해야 한다.
그런 점에서 우리는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신념은 본능적인 쪽에 가깝고, ‘원수를 사랑하라’는 신념은 이성적인 쪽에 가깝기 때문에 그래도 좀더 나은 사회를 이루기 위해서 미리엘 신부를 집단이성의 모델로 삼아야 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법이 무조건적인 보복과 응징의 수단이 되어서는 안 된다. 법은 인간사회를 아름답게 유지하기 위한 최소의 수단이 되어야 한다. 법이 보복과 응징의 수단이 된다면 무리한 법 적용으로 오히려 사회 부적응자를 양산하게 되고, 그 피해는 엄격한 법 적용을 주장했던 사람들이 고스란히 받게 된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가 증명하고 있다.
<레 미제라블>은 완벽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미리엘 신부를 희망으로 그려주고 있다. 요즘과 같이 누군가의 잘못에 대해 엄격한 법 적용만이 능사인 것처럼 형성된 여론이 집단이성을 마비시킬 수 있다는 것에 경각심을 가져야 한다. 설사 범죄자라 할지라도 한번 더 기회를 줘서 갱생의 길을 걸을 수 있도록 배려를 해야 한다. 그 희망을 미리엘 신부가 우리에게 던져주고 있는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