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칼럼] 이천오층석탑이 띄우는 편지│이동준 이천문화원 사무국장
[설봉칼럼] 이천오층석탑이 띄우는 편지│이동준 이천문화원 사무국장
  • 이천설봉신문
  • 승인 2023.10.23 10: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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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동 준
이천문화원 사무국장

됴쿄 오쿠라박물관 앞에는 100여 년 전 일제강점기 때 일본으로 반출된 이천오층석탑이 서 있다. 이 글은 그동안 수 십 차례 석탑을 되찾아오려는 이천시민의 노력을 보면서 석탑의 입장을 헤아리며 쓴 글이다. 

사랑하는 벗님들, 도착하셨습니까?
길고 긴 세월 동안 타향에 오래 있었더니 님들의 오시는 발걸음만 들어도 고향에서 오시는 벗님들인 걸 알겠습니다. 지난 몇 년간 저는 몸이 하나하나 해체되어 수장고에 들어가는 수모를 겪었습니다. 관 속에 누운 미이라처럼 저는 길고 긴 어둠에 휩싸여 죽은 듯 싶었습니다. 그때는 정말 제가 다시 눈을 뜰 수 있으리라 기대하지 않았습니다. 그런데 보십시오. 이 따사로운 가을 햇빛을 다시 느끼고 있습니다. 그리고 그리웠던 벗님들을 다시 만나게 되었군요. 

제가 이곳 머나먼 타향으로 강제로 옮겨온 지 백 년이 넘었습니다. 

기다리고 또 기다렸습니다. 저를 잊지 않고 되찾아오겠다며 고향에서 10만 명이 넘는 사람들이 서명운동을 벌이고 수십 권의 서명부를 들고 이곳에 오셨을 때를 저는 아직도 생생하게 기억합니다. 이제야 고백하지만 기나긴 세월 동안 벗님네들이 나를 잊지 않고 있으리라는 그 믿음이야말로 저의 든든한 버팀목이었습니다. 보이십니까? 저는 향기로운 님의 발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이 멀었습니다. 

알고 계십니까? 저는 천년의 세월 동안 말없이 지켜보고 또 지켜보았지요. 

사내아이를 낳게 해달라고 백일 동안 기도하며 제 주위를 돌던 아낙네와 전쟁에 징집이 되어 끌려간 지아비가 무사히 집으로 돌아오게만 해달라고 눈물로 기도하던 여인네의 사연, 흉년으로 배곯는 가족들을 부디 살려달라는 기도며, 억울하고 분통한 일을 당해 그 한을 풀어달라는 애달픈 기원들이 저의 몸 기단 구석구석 스며있습니다. 

저를 되찾아오는 것만이 능사가 아닙니다. 부디 당당하십시오. 

의로움과 불쌍히 여기는 자비의 마음을 잃지 마십시오. 천년의 세월 동안 제 앞에 머리를 조아리며 서원했던 고향 땅 과거 중생들의 기도가 저를 둘러싸고 있음을 기억하십시오. 

부디 저를 찾겠다는 의지도 좋지만 그걸 위해 자존심을 내려놓진 마십시오. 

저를 저의 가치에 상응하는 다른 문화재나 예술품으로 여기 오쿠라재단 측과 흥정하진 말아 주십시오. 비록 이들이 저를 박물관이나 호텔 경내의 조경과 정원 장식을 위한 장식품으로 여긴다고 할지라도 저들이 언젠가는 탑파에 서린 수많은 중생의 비원과 기도의 참뜻을 헤아릴 날이 오고야 말리라는 소망을 저는 내려놓지 않을 것입니다. 

제가 이곳에 오게 된 것은 알고 보면 이곳 사람들의 무지와 무명으로부터 비롯된 것입니다. 저는 언젠가 이곳 오쿠라재단 분들도 그걸 깨닫게 되리라 믿고 있습니다. 이곳 사람들은 불심이 깊은 사람들 아닙니까? 그러니 오래 참는 인내의 마음과 자비한 마음으로, 길을 잃고 헤매는 어린양이 기루어서 아파하듯, 이곳 사람들을 넉넉히 품어주는 자세로 협상에 임해주시길 바랍니다. 

아아, 조만간 다시 고향 땅을 밟아보는 날이 오겠지요. 강산도, 공기도, 인심도 예전 같지 않을 테지만 저녁이면 집집마다 피어오르는, 고향 이천의 구수한 쌀밥 내음은 여전하겠지요. 그날이 그립고 그립습니다. 

2023년 10월 11일 
이천을 그리워하고 
이천으로 돌아갈 날을 기다려온 탑파 올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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