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칼럼] 신언서판(身言書判)에서의 언(言)│오흥재 경영학 박사
[설봉칼럼] 신언서판(身言書判)에서의 언(言)│오흥재 경영학 박사
  • 이천설봉신문
  • 승인 2023.08.24 1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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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언서판(身言書判)에서의 언(言)
 

오 흥 재
수필가, 경영학 박사

말 잘하는 사람을 보는 것은 즐거운 일이다. 입만 열면 재치 있는 단어들이 쏟아져 나오는 사람, 그런 사람을 보면 분명 유쾌해진다. 하지만 “말 잘했다” 이건 칭찬인가 하면, 나무람이고 또 핀잔이기도 한 묘한 말이다. 핀잔일 때는 말 같지도 않은 말, 억지 부리는 말 따위를 의미한다.

그러니까 나무람 일 때 “말 잘했다”는 이른바 아이러니가 되는 셈이다. 말 같지도 않을 말을 뒤집어서 비꼬는 것이 된다. 요즘 우리들이 신문을 읽고 tv를 보면서 무심코라도 자주자주 “그 말 잘한다”라는 아이러니를 내뱉게 되는 것은 웬 까닭일까?

그나마 큰 자리,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들이 발언하는 것을 들을 때 드물지 않게 국민들이 “그 말 잘한다”라고 말하게 되는 건 무엇 때문일까, 사회적인 신분이 높을수록 그들 말이 땅바닥을 뒹굴고 진흙 구덩이 속에 내리 박히는 것을 목격하는 것은 일반 국민으로 서도 괴로운 일이다.

예로부터 대장부의 덕목으로 또는 지도자의 품격으로 신언서판(身言書判)을 내세워왔다. 하지만 오늘날 그게 잊히고 있는 것 같아서 안타깝다. 그러니 새삼 경구라고 해도 좋고 잠언이라고 해도 신언서판을 되새겨 보자.

인물 좋고, 말 잘하며, 글씨 잘 쓰고, 사리 판단에 밝아야 관리 노릇 제대로 할 수 있다고 본 것이다. 다름 아닌 신언서판(身言書判)이다. 그것이 우리나라에서는 전통적으로 한 인간의 능력과 인품을 매기는 4대 기준이 되어왔다. 특히 선비며 벼슬아치에게서는 절대 기준이 되어왔다.

그런데 오늘날 서(書)가 컴퓨터의 자판 찍기에 밀려나면서 덩달아 신언서판의 셋도 한꺼번에 퇴락하고 있는 것 같다. 언(言)을 말이라고 했지만 그렇게 단순하지는 않다. ‘언’이 말의 내용만 가리키지는 않는다. 논리도 언이고 따라서 말투, 말버릇도 물론 언이다. 

더욱이 언행이라면서 언이 행동이며 행위와 짝지어서 사용된 것은 큰 뜻을 품고 있다. 언행일치하면 말을 행동으로 실천하는 것만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말이 곧 행동이요, 행위가 말임에 대해서도 시사하고 있다.

말을 떠난 행동이 없듯이 행위를 떠난 말이 없다는 것도 십분 의미하고 있다. 뿐만 아니라 신(身)과 짝지어서 신언이 되면 몸가짐이며 행실이 곧 언어요, 언어가 다름 아닌 처신임에 대해서 말하게 된다. 언행이나 신언이나 어차피 말이 인간이고, 인간이 곧 말임을 대해서 일러주고 싶다.

말은 인간의 로고스요 이법이다. 그런 판국에 누가 말을 함부로 하면 그나마 내뱉다시피 아무렇게나 하고 즉흥적으로 토하고 하면 어떻게 될까? 더구나 나라의 큰 자리, 높은 지위를 누리고 있는 사람이 그렇다면 나라꼴은 또 어떻게 될까? 답은 아주 뻔하다.

그의 행실도 인품도 파탄을 빚고 있다고 말할 수밖에 없게 된다. 그가 국민들에게서 그래 말 한 번 잘한다는 아이러니를 들을 적마다 나라꼴이 구겨질게 뻔하다. 언책(言責)이란 말이 오래도록 사용되어 왔다. 그건 두 가지 뜻을 갖고 있다. 하나는 공동체에서 살아가면서 공동체의 이익이나 복리를 위해서 마땅히 할 말 해야 하는 책무를 의미한다.

공중을 위해서 중론을 모아서 말해야 하는 책임이라고 해도 좋다. 한데 또 다른 하나는 말한 사람이 그가 한 말에 대해서 스스로 져야 하는 책임이다. 이 두 가지 의미의 언책이 제대로 구실을 다하고 또 지켜질 것을 전제하고서야 공인은 공적인 발언을 해야 한다. 그래야 신언서판이 살고 그의 인품도 지켜진다. 그렇지 못한다면 아예 입 닫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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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날은 여론의 시대다. 중론과 공론의 시대다. 그건 저 혼자의 생각을 잘난 척하고 떠벌리는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공인들의 공적인 발언은 국민들을 먼저 생각하고 남들을 배려해야 한다. 그렇지 못할 바에 침묵을 지키는 것이 차라리 현명할 것이다. 그들에게야 말로 침묵이 금일 것이다. 쓸데없는 말들을 쉴 새 없이 쏟아내는 것은 분명 자신의 가치를 떨어뜨리고 이미지를 깎아내리는 것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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