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 눔 과 나 누 기
나 눔 과 나 누 기
  • 김숙자 기자
  • 승인 2009.02.12 10:2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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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의협 카네기 이천여주 총동문회장

인류는 오래전부터 구분된 자연의 섭리를 따라 살아왔다. 나눔 또한 자연의 법칙이다. 자연도 4계절로 나눠져 있고 살아있는 것들은 언젠가는 죽게 마련이다  모두가 생과 사로 생성을 거친 후에는 마지막으로는 죽음을 맞이한다.
우주에 있는 수많은 별들도 새롭게 태어나기도 하고 그러다 죽어간다고 한다. 인간도 태어나는 것과 죽음이란 것으로 삶이 양분되어 있다.
하루도 낮과 밤이 있고 사람도 남자와 여자로 양분되어 있으며 인류도 동서로 갈라져 이데올로기를 만들어 놓고 다투면서 전쟁과 평화를 거듭하고 있다.
나누기는 둘로 가를 때 비교적 편하고 부작용이 적을 상 싶다 그러나 어느 면에서는 완충이란 제3지대가 없어 오히려 타협이나 절충이 않되 극한 감정을 유발하기도 한다.
세상일은 당사자만의 일이 아닌 경우가 대부분이므로 결코 두 사람만으로는 해결이 되는 것이 아니다.
요즘도 가자지구에서는 서로의 이념과 자국의 이익을 챙기고 나름대로의 몫을 찾으려는 과정에서 무수한 생명을 앗아가고 있다. 우리의 정치인들도 여야가 극한 대립과 투쟁만을 보이고 있어 국민의 탄성은 높아만 간다.
자신의 몸을 태워 빛을 밝히는 초불, 이 순결하고 고귀함을 상실케 한 초불집회가 오늘의 우리 사회의 일면을 잘 말해주고 있다.  
평화와 공공의 이익이란 이름아래 실속을 찾으려는 이들, 조금 더 가지면 무엇 하며 덜 가지면 무엇이 문제인가 나눔을 잘 해야 분쟁이 없는데 하는 생각을 한다.
어차피 우리 생활도 나눔의 문화인 것 같다. 부부가 정을 나누고 친구가 우정을 나누며 연인 사이에 사랑을 나누듯이 나눔이 있기에 아름답고 행복하다.
그러나 이 나눔이 잘못돼서 불화와 반목을 하며 불행의 늪에서 헤어나지 못하고 있다.
사랑하는 자식을 앞에 두고 부부가 갈라선다면 피해는 선의의 제3자인 그들의 자식이 받게 된다.
단순이 둘로 갈라져도 어려운데 셋으로 나누는 것은 더 어렵다고 생각하나  반대로 가장 쉬운 방법을 생각해보자.
그리고 셋으로 잘 나눠진다 하더라도 사실상 수만의 나눔은 의미가 없는 경우가 많다.
단순한 나누기로 만일 동전 10개를 셋이 나눌 때 세개씩 나누고 나면 나머지 한 개가 문제가 된다. 이때 누군가 한 개를 더 갖으려 하면 나머지 두 사람은 한 개를 덜 갖게 된다. 하나를 더 갖는 사람보다 하나씩 덜 갖는 사람의 수가 배나 되어 갈등과 분쟁이 생긴다. 이때 한 개를 셋으로 잘라서 갖을 수도 없고 너도 나도 못 갖게 연못에 던져 버리는 어리석은 잘못을 해서도 않된다.
세 사람 모두가 다른 사람이 갖도록 서로 양보할 때 누가 갖던 문제가 되지 않는다. 두 사람은 양보해서 만족하고 오히려 하나를 더 차지한 사람은 빗이 되어 부담스러워 언젠가는 갚아야 한다. 어떻게 보면 두 사람은 모두 한 개를 적게 갖은 것이 아니고 결국은 하나도 못되는 1/3개만 부족한 것이 된다.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다.
어떤 일을 하면서 각자의 역할을 분담해야 할 경우가 자주 발생한다. 그러나 인간은 능력과 형편이 모두 다르기 때문에 균등하게 나누기란 곤란하다.
어떤 때는 셋이 아니라 더 많은 몫으로 나눌 경우도 많다. 나누기를 획일 적으로 하거나 균등하게만 나눌 수는 없는 일이다. 그렇게 나누면 비능률적이며 역할 분담의 의미가 없어진다.
문제는 이익을 나눌 때는 위와 같이 덜 가지면 되지만 반대로 손실과 희생 그리고 책임을 지는 일을 분담할 때 더 큰 문제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누구나 더 책임을 지려 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나 누군가는 해야 할 일인데 다들 피하려는 생각만 한다면 문제를 어떻게 풀 것인가. 문제의 해결을 위해서는 한사람이 십자가를 지는 수밖에 없을 것이다.
세상에는, 먹이가 있는 곳엔 항상 적이 있고, 영광이 있는 곳엔 상처가 있다. 라는 말이 있다.
적과 싸우지 않고는 먹이를 차지 할 수 없고, 영광도 희생과 상처 없이는 얻을 수 없다는 뜻이다.
열을 셋으로 나눌 때 하나를 더 가져야 한다는 욕심을 버려야 한다. 전쟁을 치른 부상병은 평화가 가장 소중하다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 우리는 하나를 더 갖기 위해 몇 개를 잃는 투쟁과 갈등에 정력을 소모해서는 않된다.
반대로 열 이란 희생을 필요로 할 때 두 사람에겐 셋 반씩 나눠서 책임을 지게해서 일곱은 해결을 하고 자신은 나머지 셋만 책임진다면 이들 세 사람들은 과연 어떤 관계가 될 것인지 생각해 보라. 결코 원만치 못할 것이다.
더 갖고, 덜하면 결국은 두 사람의 적을 만들 것이다. 그러나 차라리 덜 갖고 더 희생하면 두 사람 외에도 많은 사람의 신뢰와 사랑을 받을 것이 분명하다. 적게 잃고 크게 얻는 나누기의 지혜가 아닌가 한다.
세상의 치졸한 삶의 현장에서 오늘 우리가 해야 할 몫을 잘 찾아야 겠다. 이해가 엇갈리는 우리의 삶, 어떻게 하면 열을 셋으로 잘 나눠야 하는지 생각하도록 하자.
우리 모두는 양보와 희생을 아끼지 말아야 한다. 그래야 살만한 세상이 만들어 진다.
구정을 맞이하여 새로운 각오를 하면서 오늘의 삶이 편견과 아집이 아닌지 냉정하게 생각해 보라. 삶의 일부는 자신을 위해서, 일부는 가족을 위해서, 일부는 사회를 위해서 어느 한쪽으로 치우치지 않도록 잘 분배해가며 사는 지혜를 갖도록 노력해야겠다.

                           2009. 1.  26.
                    己丑年 正月 초하룻날 새벽에   icbong@hanmail.net 설봉신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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