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기억속의 6.25
내 기억속의 6.25
  • 오주영 기자
  • 승인 2013.07.12 09: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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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전쟁 63주년을 맞이하여, 본지에서는 6.25를 경험하시고 당시의 기억을 나누어주실 분들을 만나서 이야기를 들어보았다. 이 인터뷰는 개인적인 기억에 의존한 것임으로 전쟁과정의 정확한 전개순서, 발생사건과 차이가 있을 수 있다. <편집자 주> 
 
북침의 현장을 목격하다. 
“꽝! 새벽 4시가 조금 넘어서 포소리가 났어요” 6.25 당시 20살이던 김정희 할머니(82)는 개성에 살고 있었다. 4시 통행금지 해제 싸이렌 소리가 울리고 대포소리를 들었다. 아버지가 밖에 나가서 주위를 살피셨는데 우리 국방군인들의 모두 허겁지겁 군으로 귀대를 하는 모습이 보였다. 일요일 휴가를 나와서 집에서 자고 있다가 포소리에 놀라서 군으로 돌아가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리, 철도, 대로 등 곳곳에 인민군이 총을 겨누고 서 있었고, 군인들은 인민군에게 들킬까 두려워 군복을 벗고 고쟁이와 농민모를 빌려 입었다. 이어 인근 학교에서는 기관총 소리가 이어져서 가족들은 집 근처에 파 놓은 방공호로 피신했다. 인민군의 탱크와 군인들을 태우고 물자를 실은 소달구지가 개성으로 끊임없이 들어왔고, 사흘 만에 서울이 함락 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왔다.  
의원군에 끌려가 포로수용소에 갇히다.
“우리 큰 딸이 6.25둥이라오” 파주 교하면에서 농사를 짓던 박우천 할아버지(83)는 첫 딸을 낳던 그날 전쟁을 맞았다. 인민군은 동두천-의정부-미아리-서울과 파주-금천-문산을 거치는 노선으로 남하했다. 파주의 청년들은 피난은 고사하고 모두 의용군으로 끌려갔다. 박 할아버지도 사리원 훈련소에서 17일간 교육을 받고 의용군에 편입되었다. 군복도 제대로 없었고, 머리만 깎아서 전쟁터로 내몰렸다. 낙동강까지 밀려 내려갔다가 인천상륙작전으로 패잔병이 되어, 원주, 홍성을 거쳐 춘천 수용소에 끌려갔다. 가족들과 연락도 두절되어 포로수용소에 있다가 휴전협정 이후 이승만 대통령의 포로교환으로 다시 집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최전방에서 혹한혹서와 싸우며...         
“6.25때 나는 서울고등학교 2학년 학생이었다우” 이형구 할아버지(81)는 학교에서 전쟁 소식을 들었다. 학교에서 수업을 하고 있는데, 싸이렌 소리가 나며 이북에서 쳐들어온다는 소식을 들었다. 인민군에 잡혀 끌려갈까 두려워 학생들은 저마다 도망치기에 바빴다. 인민군의 탱크가 중앙청, 서울역을 점령하고 빨간 깃발이 펄럭였다. 집 식구들도 뿔뿔이 흩어져서 남으로 남으로 부산까지 피난을 갔다. 1952년 군인에 입대해서, 최전방으로 배치되었다. 당시에는 훈련 기간도 짧고 총 쏘는 법만 가르쳐서 전쟁터로 내몰았다. 이 할아버지는 중부전선 포천으로 배치를 받아 싸웠다. 1952-1953년 전쟁이 가장 치열하던 시기, 그 여름은 유난히 덥고 비가 많이 내려서 부상을 당하면 상처가 바로 곪았다. 겨울에는 영하 23도의 추위 속에 한길 넘는 폭설이 계속되어 쌓인 눈 속에 빠져 죽는 군인들도 발생했다. 양식과 비품의 수송로도 툭하면 끊겨서 며칠씩 굶주림을 참아야했다. 그때 16개국에서 파견된 UN군이 많이 도와주고, 함께 싸웠고 전사를 한 사람도 많다. 참 고맙다.         
동생들을 줄줄이 데리고, 아버지를 찾아서...
“우리 집은 창동에서 포목가게를 했어. 매달 25일이 월급일이니까, 23일쯤 되면 새 물건들을 창고에 잔뜩 들여놓고 장사준비를 하는데, 23일 날 하루종일 국군들이 서울로 계속 내려가면서 우리에게 빨리 피난을 가라고 했지” 이애자 할머니(77)는 한국전쟁 당시 14살 소녀였다. 장녀로 사업을 하시는 아버지의 총애를 한 몸에 받고 밑으로 8살, 6살, 4살, 2살 동생들이 있었다. 24일 날, 가족들은 가게의 문을 닫고 피난길에 오르지만 뚝섬 광나루에서 멈춰서고 만다. 한강철교가 끊어졌고, 서빙고 현재 잠수교자리에 고무다리가 놓였다. 너무 어린 동생들 때문에 다시 집에 돌아왔지만, 이미 가게 창고 속의 물건과 집의 살림살이는 모두 털렸다. 당시 돈암동 성북경찰서의 보안주임을 하던 작은아버지 때문에 인민군으로부터 반동으로 몰리는 위기도 겪었고, 먼저 피난길에 오른 작은아버지 대신 그 작은집 가족들을 안전한 곳으로 피난시키기 위해 아버지가 남은 가족들을 장녀인 이 할머니에게 맡긴다. 어린 가장이 된 14살 소녀는 할머니와 어머니, 그리고 동생들을 데리고 피난길에 오르는데, 피난 중에 어머니가 박격포 파편에 맞아 부상을 당하고 할머니가 행방불명된다. 아버지를 찾기 위해 대구까지 가는 도중 기지를 발휘해서 가족들을 석탄을 실은 기차 짐차 칸에 태운다. 만고 끝에 대구에서 아버지를 찾았는데, 긴 여정에 석탄 먼지로 얼굴이 새까만 가족들을 알아보지 못했다. 피난 중에 2살짜리 갓난쟁이 동생을 잃었지만, 슬픔 보다는 짐을 덜었다는 안도감이 더 크게 느껴졌던 그 시절, 6.25는 14살 소녀는 산전수전 다 겪은 애 어른이 되었다. 이 할머니는 당시 살던 동네에서 인민군이 후퇴할 때 피랍된 사람들이 흰옷을 입고 철사로 두 손을 묶인 채 성신여대 언덕을 넘어 고대뒷산에서 처형되던 광경을 목격했다며, ‘단장의 미아리 고개’란 노래의 가사를 되뇌었다.     
 
단장(斷腸)의 미아리 고개 
미아리 눈물고개님이 떠난 이별고개
화약연기 앞을 가려 눈 못뜨고 헤매일 때
당신은 철사줄로 두 손 꼭꼭 묶인채로
뒤돌아보고 또 돌아보고 맨발로 절며절며
끌려가신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아빠를 그리다가 어린 것은 잠이 들고
동지섣달 기나긴 밤 북풍한설 몰아칠때 
당신은 감옥살이 그 얼마나 고생을 하오
십년이 가도 백년이 가도 살아만 돌아오소
울고넘던 이 고개여 한 많은 미아리고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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