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봉서원 배향인물 놓고 '사학계 논란'
설봉서원 배향인물 놓고 '사학계 논란'
  • 이천설봉신문
  • 승인 2005.12.19 11: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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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원창건당시 3현사, 기록없이 1인추가
1977년 현충탑 건립시 유허비에 추가돼


지난 9일 이천설봉서원 복원건립을 위한 공사가 시작된 가운데 설봉서원 배향인물을 놓고 이천지역 사학계가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이천지역 향토사학자에 따르면 이번에 복원건립을 추진하고 있는 이천설봉서원은 조선 명종19년(1564년)에 이천부사로 있던 정현을 중심으로 한 지방 유림의 공의로 서희, 이관의, 김안국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3현사로 창건 되었다. 또한 선조25년(1592년)에 본래의 위치인 안흥지에서 현재의 서원터인 설봉호수 입구 우측으로 이건하면서 최숙정을 추가배향 했다고 알려지고 있으나 문헌기록에는 이러한 사실이 나타나지 않고 있다는 것.
최숙정을 추가 배향해 3현사에서 4현사로 바뀌었다는 논란속에 1870년에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이천설봉서원이 훼철된 후 지난 1977년 9월, 완전히 폐허화된 서원터에 현충탑을 건립하면서 이러한 논란이 또다시 불거지기 시작했다. 현충탑을 건립하면서 만들어진 설봉서원유허비 뒷면에 설봉서원 봉사황을 음기했는데 이곳에 '소요재공 최숙정 선생'의 봉사 기록을 추가했으며 이러한 사실을 근거로 한국민족백과사전에 최숙정을 배향했다는 기록이 남게 됐다는 것.
실제로 이천시지에도 '설봉서원에 배향한 인물을 두고 이천시의 향토사학자와 유림들 가운데 이견이 분분하다'며 '읍지류의 문헌에 삼현사, 설봉서원 등의 기록이 있어 세분만 모셨음이 분명한데 어떠한 근거로 설봉서원유허비 뒷면에 최숙정의 배향사실을 기록했느냐'는 문제제기가 기록돼 있다. 또한 이천시지에는 '설봉서원유허비에 기록된 사실을 바탕으로 한국민족대백과사전에 1593년(선조26년)에 관고동으로 이전하면서 최숙정을 추가배향 했다고 기록하고 있으나 이것은 사실과 다르다'는 내용을 기록하고 있다.
특히 이천시지에 따르면 '최숙정의 문집인 소요재집에도 추배된 사실을 증빙할만한 기록이 없으며 최숙정의 배향사실은 1970년대에 제작된 유허비 뒷면의 기록과 재실안에 걸려 있는 현판 2개가 전부'라며 '재실안에 걸려있던 현판인 서원유적고사와 설봉재실기는 1974년 이종두라는 사람이 쓴 내용으로 최광세의 남다른 노력으로 1970년에 재실을 짓고 향사를 잇게 됐다는 칭송과 함께 4현사였음을 의식적으로 강조한 내용이 담겨있다'고 밝히고 있다. 또한 이천시지는 '어떠한 인연으로 최광세라는 분이 설봉서원 재실의 중창에 적극 희사했는지 자세한 내용이 없다'며 '삼현사인지 사현사인지 논쟁의 여지가 있으나 재실 현판의 기록으로 보아 1970년 당시부터 사현사로 되지 않았나 생각된다'고 밝히고 있다.
이러한 사실이 알려지면서 설봉서원을 복원건립하는 차원에서 당초 조선시대에 건립당시처럼 3현사로 만들어야 한다는 여론과 수년동안 4현사로 알려진 만큼 4현사로 건립해야 한다는 여론이 팽팽히 맞서고 있어 이천지역 사학계가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한편 이러한 사학계의 논란속에 이천시는 소요재 최숙정까지 배향하는 4현사로 서원을 복원한다는 계획을 세우고 이천설봉서원 복원건립을 위한 기공식을 가졌다.


진영봉 기자
< icbong@yahoo.co.kr >
        이천설봉신문 2000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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