언제부터 사현사였는지 정확히 기록해야
언제부터 사현사였는지 정확히 기록해야
  • 이천설봉신문
  • 승인 2005.12.19 11: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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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천설봉서원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훼철된 후 150여년만에 복원공사가 시작됐다. 지난 2000년 설봉서원에 배향된 인물들의 후손들과 유림들로 구성된 설봉서원복원건립추진위원회를 중심으로 설봉서원 복원을 추진했었다.
수년동안 추진됐던 설봉서원복원추진 과정에서 부지매입과 자금확보 등의 어려움을 겪다 지난 9일 기공식을 갖고 공사를 시작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복원건립 공사가 시작되면서 설봉서원에 배향될 인물을 놓고 이천지역 사학계가 논란에 휩싸이고 있다.
당초 명종19년(1564년) 이천부사로 있던 정현을 중심으로 한 지방유림의 공의로 서희, 이관의, 김안국의 학문과 덕행을 추모하기 위해 창건된 이천설봉서원이 시간이 지나면서 최숙정까지 배향하는 4현사로 바뀌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문헌의 기록에 최숙정이 설봉서원에 배향됐다는 사실은 나타나지 않고 다만 서원이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으로 완전히 훼철된 후 일제시대까지 향사가 진행되다 1970년 향사를 짓게 됐는데 이 과정에서 최숙정이 추가 배향 된 것으로 추정된다.
최숙정의 문집인 소요재집에도 추배된 사실을 증빙할만한 기록이 없는 상태에서 최숙정의 배향사실을 기록한 자료는 1977년 9월 완전히 폐허화 된 현충탑을 건립하면서 만들어진 설봉서원 유허비 뒷면에 기록된 사실과 1974년에 이종두라는 사람이 쓴 재실안에 걸려 있는 '서원유적고사'와 '설봉재실기'에 나타나는 사실이 전부다. 배향사실이 고증에 나타나지 않는 가운데 1974년에 이종두가 쓴 재실기에는 1970년 최광세의 남다른 노력으로 재실을 짓고 향사를 잇게 됐으며 설봉서원이 사현사였음을 강조했는데 이를 토대로 사현사라는 기록이 시작된다. 이에따라 당초 설봉서원은 삼현사였으나 1970년대에 향사를 잇게 되면서 최숙정을 추가로 배향했다는 사실과 건립당시 삼현사였으나 1593년 관고동으로 이전하면서 사현사로 바뀌었다는 주장이 논란을 빚고 있는 것이다.
이천시지에도 이러한 갈등과 논란을 기록하면서 1970년대 현충탑 건립을 계기로 만들어진 유허비 기록부터 사현사로 나타남에 따라 당초 삼현사였음을 강조했다. 그러나 시지는 '삼현사인지 사현사인지 논쟁의 여지는 있으나 명현의 추배는 조선시대에도 지방 유림의 공의로 얼마든지 가능했으므로 네분 모두 배향하는 것도 무리가 없다'고 이분에 대한 해답을 찾았다. 그러나 최근 설봉서원이 복원건립을 추진하면서 70년대 빚어졌던 배향인물 논란이 이어지고 있다.
그동안 설봉서원 복원건립을 위해 4대문중과 유림들이 설봉서원건립추진위원회를 구성하고 기금을 마련하는 등 서원복원 건립에 많은 노력을 기울인 것이 사실이다. 또한 최숙정도 이천을 대표하는 학자로 서원에서 배향하는 것도 타당할 것이다. 그러나 언제부터 최숙정이 추가배향됐는지의 사실은 명확히 기재해 후손들에게 정확한 정보를 전해야 할 것이다.


이천설봉신문 2000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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