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다산 정약용을 기리며│한문석 선교사(요셉)
[기고] 다산 정약용을 기리며│한문석 선교사(요셉)
  • 이천설봉신문
  • 승인 2023.02.17 16: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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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산 정약용을 기리며
 

한 문 석선교사(요셉)
한 문 석
선교사(요셉)

다산 정약용의 고향, 경기도 남양주시 마재마을을 찾았다. 

조선 후기 무렵 다산과 형제들이 태어나고 소년시절을 보낸 생가 사랑채에는 ‘여유당(與猶堂)’이라는 당호가 걸려 있다. 이는 노자 ‘도덕경’의 한 대목인 “여혜약섭천(與兮若冬涉川), 유혜약외사린(猶兮若畏四隣)에서 기인한다. 겨울 냇물을 건너듯 머뭇머뭇거리고 사방을 두려워하듯 조심조심하라는 뜻이다. 

다산 정약용은 민족사와 교육사에 빛나는 학자이다. 동서양사상이 충돌하는 역사 속에서 실학사상과 차별 없는 평등한 사회를 이루어낸 대학자이자 개혁자이며 조선 최고의 실학자이다. 1801년 황사영 백서사건으로 강진에서 유배생활을 하다가 1818년 이태순의 상소로 풀려 나와 고향에서 조용하지만 왕성한 저술 활동을 펼쳤다. 향년 75세에 세상을 떠난 그는 여유당 뒷동산에 조용히 안장되어 있다.

시간 너머로 소년 정약용이 형제들과 공부하고 자라온 공간인 여유당에서 역사를 짚어 본다. 18세기 조선시대로 거슬러간다. 박제가, 홍대용, 이덕무 등의 학자들은 조선의 현실을 개혁하려면 청나라의 과학 기술과 문물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북학론을 펼친다. 

다산 정약용을 비롯해 정약전(정약용의 형), 권철신, 권일신, 이승훈, 이벽 등 젊은 학자들은 광주 천진암 주어사에서 강학회를 열었다. 강학회에서는 윤리적, 철학적 명제에 관한 토론과 기존의 다양한 학설들을 깊이 검토했다. 그 과정에서 유교경전에서 찾지 못했던 진리를 ‘천주실의’, ‘칠극’과 같은 천주교 경전에서 찾은 것이다.

평등사상과 박애정신이 천주교 경전의 핵심이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을 통해 오는 하느님의 의로움을 믿는 모든 사람은 신앙으로 인도되고, 누구도 차별이 없고, 인간의 존엄성을 지킨다. 

세계 질서를 주도하고 새로운 세상이 이뤄질 수 있다는 진리를 깨달은 젊은 학자들은 북학론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 청나라를 넘어 세계로 시야를 넓히자는 뜻을 펼쳤다. 그러나 강학회에 참여했던 젊은 학자들은 유교 사상과 천주교 사상의 충돌을 겪으며 순교하거나 유배를 당했다.

젊은 학자들은 뚜렷한 주관과 열정으로 새로운 진리를 찾아 나갔다. 시대는 허락하지 않았다. 조선 사회는 유학의 정통성을 굳건히 지키고자 했다. 사상의 충돌로 인해 신해박해(1791), 신유박해(1801), 기해박해(1839), 병인박해(1866)까지 천주교는 4번에 달하는 큰 박해를 겪었다.

순교는 신앙을 지키기 위해서 목숨까지 내놓은 숭고한 행위이다. 왜 순교를 해야 했을까. 영원한 하느님 나라에 참 행복이 있다는 것을 알고, 삶에서 정말로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 깨달았기 때문은 아니었을까.

뜻을 꺾을 순 없었다. 다산의 자형인 이승훈(베드로)은 중국 베이징에서 조선인 최초로 세례를 받고 돌아왔다. 이후 1784년에는 명례방 마을의 김범우 집에서 천주교 신앙 공동체인 ‘명례방 공동체’가 창설됐다. 명례방은 한국 천주교의 중심지로 역할을 했다. 이듬해 봄까지 활동을 이어가다가 집회가 발각되며 김범우가 유배를 당하는 등 박해를 당한다. 그리고 김범우의 순교 100여 년이 지난 1898년에는 명동성당이 들어섰다.

마침내 누구도 막을 수 없는 새로운 문화가 서서히 밝아왔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한 학자들의 노력은 점차 빛을 보기 시작했다. 신앙의 자유가 있고, 높고 낮음이 없이 평등한 새로운 세상. 새로운 세계 질서의 물결이 조선 땅에 펼쳐지기 시작했다. 

선교사 도움 없이 평신도들이 스스로 받아들인 신앙의 뿌리는 굳건했다. 한국 천주교의 240여 년의 역사 중에 절반에 가까운 세월 동안 신앙 선조들이 박해와 순교를 극복하면서 성장해 온 오늘날 한국 천주교를 생각한다. 

여유당을 나와 실학박물관을 찾았다. 이곳에서 다산과 실학에 대한 이야기를 자세히 살펴볼 수 있다. 다산은 생애 동안 합리적이고 이성적이고 과학적인 방법으로 살면서, 동시에 자유로운 종교생활과 평화롭고 누구나 차별 없는 조선사회를 꿈꾸었다. 백성이 잘 사는 세상, 나라를 튼튼히 하기 위함이었다.

실학(實學)은 ‘실제로 소용되는 참된 학문’이라는 뜻으로 당시 유학의 새로운 학풍이었다. 새로운 문명을 위해 실학 운동을 전개한 것은 다산의 빛나는 업적이다. 다산은 과학적이며 실용적인 ‘실사구시의 학문’을 통해 기존 학풍에서 벗어나고자 했다. 다산은 실학을 접한 후 서학에도 많은 관심을 갖게 됐다. 서학은 서양의 과학과 기술을 합친 것을 뜻한다. 

다산의 깊은 뜻을 기억하며 실학박물관을 나왔다. 길을 따라가다 보니 강변에 조상된 다산생태공원에 발길이 닿았다. 강물은 서로 부딪히면서 한없이 흐른다. 바싹 마른 단풍은 붉게 타올랐을 것이다. 신앙을 위해 피 흘린 순교자들을 떠올리게 한다. 이 강을 건너면 한국 천주교 발생지인 광주 친진암 성지가 있다고 한다.

끝없이 불어오는 바람에 풍경도 흔들린다. 갈대는 바람의 방향을 따라 일렁거리고, 시들어가는 국화는 한없이 서글프다. 국화 위로 벌과 나비가 외롭게 날고 있다. 

위대한 인류애와 문화적 유산을 남긴 다산 정약용을 깊이 생각하면서 한국 천주교회 창립 주역들이 살던 터전이고 말도 쉬어간다는 조용한 마재마을을 뒤로하고 집으로 돌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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