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기고] 무지로 인한 역사 왜곡: 찬란한 금속 활자 인쇄 역사의 진실│유우식 박사
[특별기고] 무지로 인한 역사 왜곡: 찬란한 금속 활자 인쇄 역사의 진실│유우식 박사
  • 이천설봉신문
  • 승인 2022.09.22 17: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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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지로 인한 역사 왜곡
찬란한 금속 활자 인쇄 역사의 진실

 

유우식 박사미국 캘리포니아주 웨이터마스터스 대표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객원연구원
유우식 박사
미국 캘리포니아주 웨이터마스터스 대표
경북대학교 인문학술원 객원연구원

역사 왜곡은 역사를 사실과 다르게 왜곡하는 것으로 국가 간의 외교행위에서는 적성국 또는 경쟁국의 정통성을 부정하고 위협하는 수단으로 사용되고, 국내에서는 반대파에 대한 정치적인 공세로 사용되기도 한다.

역사연구는 독립성이 존중되며 학술적인 결론이 모두가 인정하게 되는 것이 가장 바람직하다. 그러나 현실적으로는 역사가 사실에 근거한 학술적인 역사로 그치지 않고 정치행위의 명분으로 작용하기 때문에 역사학계 내에서조차 갈등이 유발되기도 한다.

개인, 사회, 국가 간에도 다양한 의견과 유불리가 작용하기 때문에 중립적인 평가를 기대하는  것은 생각만큼 쉽지 않다. 역사 왜곡하면 떠올리게 되는 것은 우리의 고대사를 사실과 다르게 기술하는 중국의 동북공정, 식민지화를 정당화하거나 우리 국토의 소유권 등을 주장하는 일본의 역사왜곡 등 주변 국가의 움직임을 생각하게 된다. 

우리 손에 의한 역사왜곡도 어렵지 않게 마주치게 된다. 의도적인 역사 왜곡도 있어왔으나, 무지로 인하여 왜곡된 역사를 우리 손으로 해외에 홍보하는 경우도 있어 안타까움을 금할 수 없다.

『직지』 앞에 항상 따라붙어 다니는 “현존하는 세계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수식어는 우리에게는 오래되고 익숙한 캐치프레이즈이다. 『직지』는 고려시대 청주목(淸州牧)에 있었던 사찰 흥덕사(興德寺)에서 금속활자로 인쇄된 불교서적으로 정식 명칭은 『백운화상초록불조직지심체요절(白雲和尙抄錄佛祖直指心體要節)』이다. 

『직지』 또는 『직지심체요절』로 줄여 부르는 경우가 많다. 고려의 승려백운화상이 중국에서 가져온 요절을 재구성하여 엮은 것으로, 현재 남아있는 본은 1372년 제작이 시작되어 1377년에 간행된 것이다. 독일의 요하네스 구텐베르크가 간행한 금속활자본 『42행 성서』보다 78년 앞서 인쇄된 것으로 우리 민족의 인쇄 기술의 역사의 자랑이기도 하다. 최근에는 우리의 금속활자 인쇄술이 실크로드를 통하여 유럽으로 전파된 것일 수도 있다는 생각을 가진 연구자들이 동서양의 금속활자술의 연관성을 조사하기 위한 국제적인 프로젝트가 진행되고 있다.

『직지』는 각 상권, 하권의 2권으로 구성되어 있다. 현재 프랑스에 있는 금속활자본  『직지』의 원본은 하권에 해당하며, 상권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직지』는 구한말 당시 주한프랑스공사이며 고서적 수집가이기도 했던 빅토르 콜랭 드 플랑시(Collin de Plancy)가 구입하여 프랑스로 귀국하였다.

1900년에 개최된 파리 엑스포 한국관에 소개되기도 하였으나, 당시에는 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이후 1911년 프랑스 드루오 경매장에서 앙리베베르가 경매로 구매하여 소장하다 1952년 프랑스 국립도서관으로 기증되었다.

『직지』의 가치가 재조명된 것은 재불역사학자이자 프랑스 국립도서관 사서였던 박병선 박사에 의해서 발견되어 1972년 세계도서의 해에 전시 되면서이다. 발견 당시 학계에서는 『직지』가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보다 더 오래된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받지 못하였다. 이후 박병선 박사의 꾸준한 연구로 『직지』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금속활자임이 입증되어 세계적인 공인을 받게 되었다. 현재는 요하네스 구텐베르크의 『42행 성서』와 함께 유네스코 세계기록 유산으로 등재되어 있다.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유산이지만 국내에 없다는 점이 매우 안타깝다. 

구한말 당시의 외국인에게는 신기한 동양의 물건으로 눈에 띄어 그 가치를 인정받아 수집의 대상이 되었으나, 우리에게는 집안에 전해지는 수많은 고서 중의 하나로 그다지 주목받지 못했다는 점이 못내 아쉽다. 이러한 일은 과거에만 국한되는 것이 아니라 현재에도 진행 중이다.

작년에는 ‘청주고인쇄박물관’의 명칭 변경을 추진하다가 부결된 일도 있었다. 고인쇄박물관이라는 명칭은 『직지』보다 더 이른 시기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판본이 발견될 수도 있다는 가능성까지도 염두에 두고 명명한 것으로 1992년 개관부터 30년간 사용되고 있다. 박물관의 이름에 걸맞게 『직지』보다 오래된 고인쇄기록물을 찾기 위한 노력이 충분했는 지는 되돌아보았으면 한다. 어쩌면 『직지』의 홍보와 ‘직지 지킴이’로서의 활동에 매진했던 것은 아닌가 하는 생각조차 든다.

우리나라 금속활자 인쇄역사에서는 기록에 의하면 직지 이전에 고려 고종 21년인 1234년에 『고금상정예문(상정고금예문)』이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으로 알려져 있으나, 아직까지 발견되지 않고 있다. 

이로부터 5년 후인 고려 고종26년인 1239년에는 『남명천화상송증도가(南明泉和尙頌證道歌)』가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으로 알려져 있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1920년대에 일본인에 의해서 처음으로 소개되었으나, 크게 주목받지 못하다가 『직지』가 세계 최고의 금속활자본으로 인정되자 주목을 받게 되었다. 1972년에 이르러 국내의 서지학자들과 과학사학자들의 관심사가 되었다. 

당시에 서울대학교 의과대학 교수, 숙명여대 총장, 성균관대학교 이사장을 역임한 일산 김두종 선생이 소장하던 『남명천화상송증도가』에 대한 논의가 활발하게 진행되었다. 마지막 장에 고려시대의 권력자였던 최이(崔怡, 1166-1249) 가 발행 경위를 기록한 발문의 내용이 소개되었다.

발문에는 불교 선수행의 지침서였던 『남명천화상송증도가』가 더 이상 전해지지 않게 되어 금속활자로 다시 인쇄한다는 의미로 해석될 수 있는 …어시모공중조주자본(於是募工重彫鑄字本)… 이 적혀 있었으나 소장본은 목판 인쇄본의 특징을 가지고 있어 금속활자본을 목판으로 번각하여 인쇄한 것으로 결론이 내려졌다. 

그 이후에 1984년에 보물로 지정된 삼성출판박물관 소장본과 2012년에 보물로 지정된 공인박물관 소장본이 차례로 발견되었다. 삼성 출판박물관 소장본은 종이와 인쇄 상태가 수려하고 목판 인쇄에서 흔히 볼 수 있는 목리문과 획의 결손 등이 많이 발견되어 목판인쇄본임이 재차 확인되었다.

1960년대 후반에 수집되어 금속활자본으로 추정된 공인박물관 소장본은 종이가 매우 얇고 인쇄상태가 고르지 못하여 서지학자들은 삼성출판박물관본과 동일한 목판으로 후대에 인쇄된 것으로 판정하여 그 결과가 지금까지 유지되고 있다.

다만 전 소장자, 현 소장자 및 일부 서지학자들은 지속해서 금속활자본임을 주장하고 있으나, 어디까지나 개인적인 소견으로 치부될 뿐 공론화되지 못하고 금속활자본임을 입증할 수 있는 객관적인 근거를 제시하지 못한 채 50여년의 시간이 경과하였다. 이후에도 대구의 개인이 소장하는 판본,대구 반야사가 소장하는 판본 및 종로도서관에 1920년대에 소장되어 2021년 3월에 서울시 유형문화재로 지정된 판본이 차례로 공개되어 현재는 여섯 가지 판본이 확인된 상태이다.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여섯 가지 판본의 이미지 비교. 금속활자본과 번각 목판본의 인쇄 특징의 차이. [자료제공=유우식 박사]
『남명천화상송증도가』 여섯 가지 판본의 이미지 비교. 금속활자본과 번각 목판본의 인쇄 특징의 차이. [자료제공=유우식 박사]

필자는 위에서 언급한 여섯 가지 판본의 이미지를 필자의 그룹에서 개발한 최첨단 이미지 분석 소프트웨어로 비교 분석하여 서지학자들의 주장과는 다르게 모든 판본이 서로 다른 인쇄 매체를 사용하여 인쇄된 것이며, 공인박물관 소장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는 최이의 발문에 적혀 있는 것처럼 1239년 9월 상순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임을 확인하는 데 성공하였다.

이러한 연구결과는 국내의 여러 전문 학술지에 연구논문으로 투고하였으나 매번 서지학자들의 강력한 반발에 부딪혀 논문의 출판으로 이어지지 못하였다. 이러한 문제는 국내에서는 해결의 실마리가 보이지 않아 스위스에 본부를 둔 Heritage라고 하는 문화재의 과학적 분석과 보존에 관한 국제 전문 학술지에 투고하여 2022년 5월과 7월에 두차례에 걸쳐 논문으로 소개하였으며 현재 세번째 논문의 심사가 진행중이다.

국내에서는 철저하게 외면당했으나 해외 학술지에서 공정한 심사를 거쳐 공인박물관 소장본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가 『직지』보다 138년 구텐베르그의 『42행 성서』보다 216년 빠른 1239년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것이라는 내용을 공인받는 쾌거를 이루었다. 국내 학술지에서는 지금까지 여덟 차례 연속으로 게재 불가판정을 받았으나 Heritage학술지의 두 편의 논문 출판을 계기로 아홉 번째 국내학술지에 투고한 논문이 한국 문화재보존과학회의 학술지인 보존과학회지의 논문 심사에 통과하여 오는 10월에 출판되게 되었다.

현재 국내 학술지에 여러 편의 논문이 투고 중이며, 연말까지는 적어도 한 편 이상의 논문이 통과될 것으로 기대하고 있다. 서지학자들의 경험과 식견에 의한 주관적인 판단의 세계에서 과학적이며 정량적인 분석을 통한 객관적 판단의 세계로 이행되는 과정에서의 여러 가지 논란은 천동설에서 지동설로 옮겨가는 것과 같은 지난(至難)한 과정이라고 할 수 있으나 그 흐름을 막을 수는 없을 것이다.

우리는 『직지』를 세계에 알리면서 “현존하는 세계최고(最古)의 금속활자본”이라는 수식어를 달아 소개해 오고 있다. 『직지』보다 138년 이른 시기에 금속활자로 인쇄된 『남명천화상송증도가』 공인박물관 소장본이 국내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우리의 찬란한 금속활자 인쇄역사의 진실을 의도치 않게 왜곡하며 홍보하고 있었던 셈이다. 서지학자들과 문화재청이 알면서도 이러한 내용의 홍보를 용인했다면 우리 손에 의한 우리 역사의 왜곡이며, 모르고 했다면 무지에 의한 역사 왜곡이다. 역사적 사실을 밝혀내려고 하지 않았다면 책임 회피 또는 직무유기라고도 볼 수 있는 중대한 사항이다.

필자는 1984년에 한국에서 전자공학전공으로 대학을 졸업하고 일본을 거쳐 미국에서 학업, 연구, 사업을 이어 오면서 우리의 자랑스러운 문화가 알려질 기회가 적은 것과 우리의 역사기 잘못 알려지는 것에 안타까운 마음이 해를 거듭하면서 커지게 되었다. 

1925년에 Carter는 콜럼비아대학교 출판국에서 출판한 책자(“The Invention of Printing in China and Its Spread Westward”)에서 인쇄기술이 중국에서 발명되어 유럽으로 전달되었다는 이야기를 하면서 조선에서 1403년에 계미자가 만들어져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인쇄가 이루어 졌다는 내용을 소개하였다.

이 책을 읽은 미국 시카고 필드박물관에서 근무하던 독일인 인류학자이자 역사지리학자는 1916년에 조선총독부에서 발행한 ‘1914-1915년의 조선에서의 개혁에 관한 연례 보고서’에 소개된 조선총독부가 조선황실에서 50만 여자의 활자를 인계 받아 정리하고 있으며 고려 고종 대에 『상정고금예문』이 금속활자로 인쇄되었다는 기록이 있다는 내용이 있다며 보다 상세한 조사를 촉구하는 글을 남겼다. 인터넷 검색도 불가능했던 거의 100년전의 이야기이다. 그들의 학문적 관심과 열정에 절로 고개가 숙여진다. 우리는 우리의 역사에 대한 무지와 무관심으로 아직도 금속활자 인쇄역사의 ‘천동설’인 『직지』‘세계최고 금속활자본설’을 세계에 전파하는 무지에 의한 역사왜곡을 하고 있는 것은 아닌 지 다시 한번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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