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별 인터뷰│강대철 작가 “근원(根源)의 자리를 찾아”
특별 인터뷰│강대철 작가 “근원(根源)의 자리를 찾아”
  • 이천설봉신문
  • 승인 2022.07.08 15: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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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상(無常)을 넘어서 근원(根源)의 자리를 찾아”

성철스님 동상·바르셀로나 올림픽 황영조 동상 등 제작한 강대철 작가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 주제 담아 한국 최초 조각토굴 수행

강대철 작가
강대철 작가

우리나라 최초의 조각토굴이 탄생했다. 그것도 단 한 사람의 손에서 말이다. 강대철 작가는 “토굴 파기는 운명이었다”라고 말한다. 시작은 소박한 우연에서 출발했다. 열 평 남짓의 아담하고 조용한 공간을 원했던 강대철 작가는 산 끝자락에 터를 파기 시작했다. 파낸 공간의 지질이 작가의 흥미를 끌었고, 마침내 흙벽을 그냥 놔두기에는 아쉽다는 생각에 달했다. 그 무렵 내린 비는 토굴을 넓게 무너뜨리며 길을 텄다.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는 듯 말이다. 

우연은 필연이 되고, 곧 운명이 된다. 인연과 인연은 서로 맞닿아 새로운 세계를 연다. 이에 이천설봉신문은 창간 21주년을 기념하여 운명적인 수행을 매일 써내려가고 있는 강대철 작가의 이야기를 게재한다. <편집자 주>

■ 안녕하세요, 강대철 작가님. 성철스님 동상과 바르셀로나 올림픽 경기장 앞의 일명 ‘황영조 동상’을 제작하시는 등 한국 조각계의 중심에서 활동하시다가 2005년 홀연히 속세를 떠나셨습니다. 17년이 지났는데요, 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이천시민과 독자 여러분께 그동안의 소식과 인사 말씀 부탁드립니다.

우선 질문이 사실과 다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제가 속세를 떠났다고 하셨는데, 저는 한순간도 속세를 떠나 산 적이 없습니다. 다만 살림터를 늙어가는 삶을 좀 더 추스르기에 적당한 곳으로 옮겼을 뿐입니다.

지난 3월에 국립현대미술관 윤범모 관장이 어느 일간지에 7년 동안 굴을 파면서 굴속 조형작업을 하고 있는 저에 대한 글을 쓰면서 마치 세속을 버리고 출가한 구도자처럼 표현한 바람에, 그 글의 내용을 인용하여 다른 신문의 기자들도 속세를 떠난 조각가 아무개라는 표현을 하게 된 겁니다.

그리고 속세라는 표현은 우리가 사는 세상을 좀 낮춰 쓰는 말이기 때문에 가능하면 사용하지 않는 게 좋습니다(웃음). 우리가 사는 현상계 속에서의 세계는 어떤 모양을 갖추고 있더라도 서로 연결되어 있기 마련이기에 세속과 세속 아닌 곳으로 나누는 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부대끼며 사는 생활현장에 있던, 깊고 외진 산속에 있던, 어떤 마음가짐으로 주어진 시공을 받아들이고 있는가가 중요한 것이지 처한 환경의 모양이 중요한 것이 아닙니다. 

제가 고향을 떠난 지도 벌써 17년이 되었군요. 정말 세월이 빨리 갑니다. 처음 살림터를 옮긴 후 10년 정도는 지금 살고 있는 전라남도 장흥의 사자산 기슭을 떠난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몇 년 전부터는 가끔 서울을 다녀오기도 했고 고향의 살림터였던 장생이 마을도 다녀가곤 했습니다. 아직 살림살이가 장생이 마을에 남아있기도 하고, 저로 인해 그곳에 자리 잡은 친구도 있기에 요즈음은 일 년에 한두 번 들립니다.

그렇게 잠깐 고향을 들릴 때 마다 엄청나게 변한 고향의 시내 모습과 커진 규모에 놀라곤 했습니다. 저도 어느새 희수(喜壽)를 바라보는 늙은 나이가 되었습니다. 가까운 지인들 중 벌써 세상을 떠난 이들도 여럿 됩니다. 이렇게 나이가 들어가니 머지않아 고향으로 돌아가 내 인생의 마지막 마무리 준비를 해야 할 때도 됐구나 하는 생각을 하곤 합니다. 

젊은 날 한때 열정을 가진 예술가로서 부지런을 떨며 살아왔기에 성공한 작가로 보이기도 했지만, 제 스스로 부족한 점이 많은 인간이란 것을 잘 알고 있었기에 항상 부족한 곳을 채우기 위해 발버둥을 치며 살아온 셈입니다. 그러다 어느 순간 그러한 채움은 열정이나 의욕으로 해결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고 살아가는 모양새를 바꾸어 살아왔습니다.

오랜 세월 나의 조형작업은 현실 생활을 유지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용했을 뿐이고, 의미를 두자면 제가 추구하는 정신세계의 내용을 전하는 조형언어로서의 기능을 이용을 해왔기에, 저는 현실의 시대정신을 천착해야 하는 예술가로서는 직무유기를 저지른 셈입니다. 예술가로서 좀 더 큰 세계를 보여주기를 바라는 고향사람들에게는 아쉬운 모습으로 보였을 것입니다

■ 전남 장흥에 한국 최초의 ‘조각토굴’을 만들고 계십니다. 현재까지 총 7개의 조각토굴을 만드셨는데요, 어떤 연유로 조각토굴 작업을 시작하게 되셨는지요?

처음부터 계획을 세워 진행된 일은 아니었습니다.
제가 새로운 살림터로 자리 잡은 이곳은 본래 어느 스님이 공부하던 토굴이었습니다. 여기서 토굴은 수행자들이 외진 곳에 머물러 공부하는 작은 거처를 말합니다. 그러니까 진짜 굴이 아니라 수행을 하는 작은 집을 일컫습니다.

이 살림터 옆에 샘이 하나 있습니다. 마을 사람들은 이 샘을 참새미라고 불렀고, 우리 부부가 사는 사자산 끝자락 골짜기를 참새미골이라 부릅니다. 아무리 가물어도 마르는 일이 없는 샘이라 붙여진 이름이었습니다.

참새미골에 머물러 두문불출 몇 년이 훌쩍 지났는데 어느 날 원택스님에게 연락이 왔습니다. 원택스님은 이 시대의 큰 영적스승 중 한 분인 성철스님을 돌아가실 때까지 지극정성으로 모신 성철스님 상좌 스님입니다.

1993년 성철스님이 돌아가시고 몇 개월이 지났을 때였습니다. 성철스님이 평생 거주하고 계시던 백련암에 성철스님 존상을 모시기 위한 동상 제작 작가로 선정되었는데 제작해 줄 수 있느냐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구도자 시리즈 작품을 제작하고 있던 중이라 제게는 큰 의미로 다가 온 인연이었습니다. 성철스님을 기리기 위한 출판사업을 비롯해서 여러 사업이 진행되고 있었는데, 사업의 총책임자가 원택스님이었습니다. 원택스님과의 인연은 그렇게 시작되었습니다.

백련암 고심원에 첫 번째 성철스님의 상이 모셔졌고 다시 성철스님이 태어나신 산청군 단성면 묵곡리에 겁외사라는 절이 건립되면서 사찰 마당 가운데에 좌대를 포함한 전체높이 6m가 넘는 입상까지 제작하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성철스님 동상 제작을 마친 후 이곳 참새미골로 살림터를 옮긴 지 삼 년째 되던 해에 원택스님으로부터 다시 연락이 온 것입니다.

성철스님 기념관을 건립하려고 하는데 그 일을 총체적으로 맡아 추진해달라는 내용이었습니다. 당시 저는 미술계를 떠나 작가로서의 모든 활동을 접고 농사를 지으면서 조용히 집필 작업을 하면서 노년의 삶을 계획하고 있던 시기였습니다. 이런저런 생각 끝에 성철스님과의 인연이 내 삶 속에 많은 영향을 주고 있음을 깨닫고 그 제안을 받아들였습니다.

성철스님 기념관 건립은 무려 5년 가까이 되는 시간이 소요되었습니다. 수백 개가 넘는 장엄조형물들을 이곳 시골 창고에서 혼자 작업을 해야 하니 시간이 걸릴 수밖에 없었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기념관일이 끝나가면서 이젠 정말 아무 일도 하지 않으면서 오로지 수행자 같은 노년의 삶을 살리라 다짐하면서 진짜 토굴을 하나 마련해야 하겠다는 생각을 하게 됐습니다.

산자락의 생긴 지형을 이용해 몇 메타 땅을 파내고 위로 지붕을 덮어 열 평 정도의 토굴 공간을 마련할 생각이었습니다. 모든 소리가 차단된 공간에서 명상에 집중해 보고 싶어서였습니다.

지질 조건이 좋지 않아 어렵게 깊이 3m에 열 평 쯤 되는 공간이 확보됐는데, 이삼일 쉬는 사이 예상치 못한 폭우가 쏟아져 산 위에서 내려온 물줄기로 인해 애써 판 토굴 공간이 무너져 내렸고, 무너진 자리에 잔뜩 물이 고여 커다란 물웅덩이가 되고 말았습니다.

난감한 기분으로 물을 빼내고 포클레인으로 무너진 흙을 걷어내고 보니 깊이도 더 깊어졌고 면적이 계획했던 것보다 배나 커져버렸습니다. 그런 과정에서 바닥이 깊어지자 독특한 지질이 드러나면서 전혀 예상치 못한 방향으로 생각의 가지가 뻗어갔습니다. 이런저런 궁리가 생기면서 굴을 뚫어 그 속에 조각을 해보자는 결론에까지 이르게 된 겁니다.

그러니까 뚫은 흙벽에다 바로 조각을 할 수 있는 조건이 되는 뜻밖의 토질이었기에 조각가입장에서는 생각지도 않은 행운을 만난 셈입니다.

■ 각 조각토굴에는 어떤 메시지를 담으셨는지요?

굴에 조각된 주제는 한마디로 “나란 존재는 무엇인가?”입니다. 

저는 작가로서 평생을 “생명”이란 명제를 가지고 작품을 해왔습니다. 자아의식을 가지고 있는 개별적 생명현상, 사회를 이루고 있는 집단 생명현상, 무한한 우주 속에서 지구라는 작은 별 위에 존재하는 인간을 중심으로 한 여러 생명현상들은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 것인가가 항상 나의 관심사였습니다.

첫 번째 굴에는 오감(五感)을 통해 들어온 정보를 가지고 생각 감정을 일으키며 자아의식(ego)을 형성해가는 과정을 표현했습니다. 그 에고가 형성되는 메커니즘을 이해함으로 자신의 정체성을 파악할 수 있도록 상징성을 담아 보았습니다. 궁극적으로는 에고라는 허상을 넘어서야만 모든 번뇌 망상을 넘어설 수 있음을 얘기하려고 했습니다.

그렇게 일곱 개의 굴들은, 존재론적 시각으로 불교의 연기법과 유식사상을 바탕으로 생명현상을 풀어낸 내용으로 조형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각 굴마다 그 주제를 가지고 명상을 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만들어 놓았습니다.

각 굴에 대한 자세한 해설은 이번에 발간한 『강대철 조각토굴』이란 명제로 발간된 책을 참고하시기 바랍니다. 

■ 7개의 조각토굴이라는 대작을 홀로 해내고 계시는데요, 이렇게 할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인지요?

한 예술가의 작업은 어느 누구나 홀로 외롭게 해 나갈 수밖에 없습니다. 

작업 자체가 자신만의 고양된 의식과 감각으로 고도의 집중된 상태로 작업이 이뤄지기 때문에 홀로일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제가 칠 년이 넘도록 지루할 것 같은 이 작업을 계속할 수 있는 것은 작업하는 행위 자체를 기도 삼아 하기 때문일 겁니다. 기도란 통으로 알아차리고 있는 상태에서 발원을 하는 행위입니다. 그렇기에 무의식에 잠재되어있는 긍정적 에너지가 동원되기 때문에 육체에 무리를 주지 않게 됩니다.

이 작업을 미리 계획을 세우고 머리로 계산을 했다면 아마 엄두도 못내 시작조차 하지도 못했을 것입니다. 불교의 유식학에서는 이 세계를 8식 또는 범어로 ‘알라야식’이라고도 합니다.

우리의 무의식 깊은 곳에는 겉의 의식의 알음알이로는 알 수 없는 무한한 잠재력과 우주적 정보들이 내재되어있습니다. 수행을 한다거나 명상을 한다는 것은 이러한 잠재 되어있는 능력과 정보들과 접촉하기 위한 행위이기도 합니다. 기도를 하는 행위도 마찬가지입니다.

■ 최근 책 『강대철 조각토굴』을 출간하셨습니다. 작가로서 남기고 싶으신 메시지가 있으신지요?

토굴에 관한 책을 내게 된 동기는 지인들의 권유에 의해서 입니다. 제 입장에서는 일 이 년 후 굴이 완성된 후 가까운 지인들과 토굴 작업을 이해할 수 있는 사람들에게만 공개할 생각이었습니다. 

토굴에 관한 책보다는 그림을 곁들인 시화집을 먼저 낼 생각이었습니다, 토굴을 뚫으며 보내는 세월 속에서 떠오르는 시적 단상들을 지인들과 공유하고 싶었습니다. 그런데 예기치 않게 토굴이 언론에 공개되어 출판사의 권유로 시집과 함께 토굴 이야기를 동시에 출간하게 되었습니다.

제 입장에서는 사람들이 시화집에 관심을 가져줬으면 했는데, 온통 토굴에만 관심을 보여 좀 섭섭합니다(웃음).
시화집 제목은 『어느날 문득』입니다. 그림도 제가 직접 그렸습니다.

■ 이외에도 작가로서 활동하시며 많은 작품을 남기셨습니다. 대표적인 작품에 대해 소개 부탁드립니다. 

제가 예술가라는 허울을 쓰고 그동안 남겨놓은 흔적들을 보면 항상 부끄러움을 느낍니다. 이런저런 조형물들을 여러 곳에 남겨놓긴 했지만 지금 보면 거의 모두 집착과 욕심의 결과물들로만 보여 민망하기까지 합니다.

2002년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작가로서의 작품 활동을 중단했습니다. 살아가는 모양새를 바꿔 구도자적 삶을 통해 영적으로 진화된 삶을 살고 싶어서입니다. 그런 제 입장에서 새삼스럽게 지나간 흔적들을 거론하며 얘기하는 것은 쑥스러운 일이니 말을 아끼겠습니다.

현재의 제 삶과 연결하여 의미를 부여할 수 있는 작업이 있었다면 혼자의 노력으로 성철스님 기념관을 완성한 일입니다. 기념관에 설치한 작업들은 불교라는 종교의 양식 속에서 장엄된 장식

조형물들이지만 한 땀 한 땀 수를 놓듯이 내 정신세계를 새롭게 조율하는 시간이 되었습니다. 5년이란 짧지 않은 시간을 작업 과정을 통해 영혼을 숙성시키는 계기로 삼을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금 마무리 단계에 있는 토굴 작업이 완성된다면, 방문하는 이들에게 존재에 대한 성찰을 하기 위한 도우미의 역할이 됐으면 하는 바람입니다.
 

■ 고향인 이천으로 오실 계획이 있으신지요? 추가로 더 진전될 작가로서의 포부를 말씀해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당연히 고향으로 돌아가 제 인생을 마무리해야 되겠죠. 지금은 폐쇄된 상태에서 사용하고 있지 않지만, 작업실도 그대로 장생이 마을에 가지고 있으니 적절할 때 조건이 맞으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 겁니다. 대화할 수 있는 친구들도 그곳에 있고, 욕심대로라면 고향에다 정신세계의 메시지를 전할 수 있는 특별한 조형 공간을 만들어 이곳의 토굴과 연계시켜 특별한 체험을 할 수 있는 명상미술관을 꾸며봤으면 하는 것이 요즈음 생각입니다. 세상에 하나밖에 없는 명상미술관이 되겠죠.

곧 장편소설 두 편과 수필집 한 편을 더 출간하게 됩니다.

출판사의 기획에 의해 추진되는 일인데 이 책들은 40년 전과 30년 전에 발표됐던 것들입니다. 재출간하는 이유는 책의 내용들이 지금 세대의 젊은 예술가들에게도 읽힐만한 내용이라는 것이 출판사의 얘기입니다. 필자로서 반응이 궁금합니다(웃음).

이 책이 출판된 후, 올 가을 10월쯤에는 새로 쓰고 있는 글이 『꿈꾸는 아웃사이더』라는 명제로 출간하게 됩니다. 제가 살아오면서 제도권 밖 변두리에서 만난 사람들 얘기입니다. 
제가 이렇게 글 쓰는 일을 계속하는 이유는 쓰는 작업 자체가 영적인 진화를 위한 행동하는 모습이고 수행의 한 모습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 마지막으로 하시고 싶은 말씀이 있으신지요?

제가 고향을 떠나 있는 세월 속에서 고향은 엄청나게 변했습니다.

문화 예술에 관한 인적 자원이 열악했던 20년 전과 비교하면 지금은 종합적인 문화도시로 자리매김을 할 수 있는 환경이 조성되어 있는 것 같습니다.. 많은 유능한 예술가들이 이천에서 자리 잡고 다양한 모습으로 활동을 하고 있습니다. 그들을 뒷받침해 줄 수 있는 인프라도 구축되어있어 보입니다.

한 지역의 격조와 품격은 그 지역의 문화예술인들에 의해서 분위기가 조성됩니다. 주민들은 문화예술인들이 드러내고 펼쳐 보이는 활동 속에서 자신들의 정서를 살찌우고 고양시켜나갑니다.

이러한 일들을 총체적으로 아우르며 성공시키기 위해선 지역 언론의 역할이 가장 중요할 것입니다. 그동안 이천설봉신문이 많은 역할을 해왔지만 고향을 사랑하는 한 사람으로서 좀 더 큰 기대를 해봅니다.

정치하는 사람들은 정치적인 목적을 가지고 예술인들을 이용해선 안 됩니다. 이천의 정치인들은 다른 지역과 달리 문화예술인들을 편 가르기에 이용하지 말고 순수하게 도울 수 있는 방법들을 연구해야 합니다.

우리가 사는 이 시대는 그 지역에 머물러 사는 문화예술인들에 의해 그 도시의 얼굴과 품격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고향을 떠나 있는 사람에게 관심을 가져준 이천설봉신문 식구들에게 감사드립니다.

■ 강대철 작가 주요 프로필

1947년 이천에서 태어나 홍익대학교 미술대학에서 조각을 전공했다. 1978년 제24회 국전(國展) 문공부장관상(문화공보부), 1978년 제1회 중앙미술대전 대상(중앙일보), 오늘의 문제작가상, 1998년 페루 리마 국제 조각 심포지엄 최고작가상 등 저명한 상을 수상했다. 경기도 문화상(예술부문)과 이천시 문화상을 수상하기도 했다. 

이천국제조각심포지엄 운영위원장, 경기도 월드컵 조각공원조성 운영위원장, 도자기EXPO 국제조각공원 운영위원 등을 맡았고, 성철스님 기념관 설계 및 동상과 바르셀로나 올림픽 경기장 앞에 “한반도와 마라토너상”등을 제작, 10여 회 개인전을 가지며 한국조각계의 중심애서 활동했다. 2002년 개인전을 마지막으로 작가로서의 작품활동을 중단하고 구도자적 삶을 살기 위해 고향을 떠나기로 했다. 살림터를 지리산에 자리 잡았다가 2005년 전라남도 장흥 사자산자락으로 살림터를 옮겨 지금까지 부인과 함께 농사를 지으며 살고 있다.

저서로는 장편소설 『끌』, 『그대몸짓 속의 그대』, 시화집 『어느날 문득』, 수필집 『세상의 그리운것들』, 『강대철 조각토굴』 등이 있다.

김숙자 발행인 / 김문수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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