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책으로 보는 우리 역사│부길만 출판역사연구회장
[칼럼] 책으로 보는 우리 역사│부길만 출판역사연구회장
  • 이천설봉신문
  • 승인 2022.06.03 14: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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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길만
출판역사연구회장
前 동원대학교 교수
문화재위원 역임

지난 4월 25일 필자는 독서운동과 시민교육을 활발히 전개하고 있는 북큐레이터 협회의 작가특강 프로그램에 초청받아 온라인 발표를 하였다. 주제는 <책으로 보는 우리 역사>였는데, 50여 회원이 참석해 발표와 질의응답을 하며 2시간 가까이 진행하였다. 이날 했던 강연 내용을 간략하게 소개하고자 한다.

한국 역사를 전쟁의 승리나 영토의 확장 따위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그리 자랑할 것이 없다. 그러나 문화의 힘, 특히 책의 관점에서 바라보면 놀랍고 위대한 역사가 있다. 몇 가지만 예를 들어 본다.

세계에서 가장 사납고 강력했던 몽골 군대가 빠른 속도로 중국, 러시아를 모두 정복하고 동유럽까지 쳐들어가니, 모든 나라들이 삽시간에 무릎을 꿇었음에도 유독 고려인들만 버텨낸 이유! 그 비밀은 팔만대장경이다. 중세시대 최첨단 정보기술이었던 금속활자 발명의 역사적 의의, 시대를 앞서간 한글 창제, 세계에서 가장 방대한 분량의 역사책 조선왕조실록을 둘러싼 이야기, 1980년대에 이미 출판대국으로 올라선 기록 등 다양하다. 하나씩 살펴보자. 

팔만대장경 조성과 국난 극복

고려인들은 외적이 쳐들어오는 전쟁 시기에도 팔만대장경의 조성에 거국적으로 나섰다. 이것은 중국의 불교 대장경이 최고의 평화시대를 구가했던 송나라 시기에 이루어진 것과 대조를 이룬다. <팔만대장경>의 조성에는 부처님의 힘을 빌어 외적을 물리치겠다는 신앙심이 바탕에 있었겠지만, 동시에 국난 극복을 위한 국민총화를 이루어내고 문화대국임을 만천하에 과시하겠다는 강력한 의지가 있었다. 

11세기 초엽 거란 군대가 쳐들어왔을 때, 고려는 대장경을 새기며 외침을 막았다.  당시 고려인들은 부처님의 가호 덕분이라고 믿었다. 이때의 대장경은 처음 새겼다 하여 초조대장경이라고 한다.

13세기에 몽골 군대는 고려에 침입하자마자 초조대장경을 불태워버렸다. 이제 고려인들은 몽골을 외적이 아니라 문명의 파괴자라고 인식함으로써 전의(戰意)를 더욱 확고히 하며, 굳건한 민족 단결을 이룰 수 있었다. 

결국, 고려인들의 강인한 의지로 이루어낸 대장경 조성사업은 장기간의 침략에 대한 항쟁을 지속할 수 있었던 원동력이 되었다. 다시 말하면, 세계 최강의 몽골 군대를 문화의 힘으로 물리치려 한 것으로 이때의 문화의식은 지금까지도 이어지고 있는 것이다. 당시 침략자였던 거란과 몽골 군대의 자취는 지금 보이지 않지만, 팔만대장경은 오늘날 인류의 정신적 문화적 자산으로 남아 있다. 즉, 1995년 유네스코에서는 한국의 팔만대장경판과 그 경판을 봉인한 고려대장경판전을 세계문화유산으로 지정하여, 문화적 가치를 인정하고 있다. 그뿐만 아니라 팔만대장경은 내용의 방대함과 정확성으로 인하여 불교 경전의 세계적 표준 역할을 하고 있다. 

고려 금속활자 발명과 문화의식

세계 최초의 금속활자 발명 역시 기술의 우위에서 나온 것이라기보다는 고려인들의 강렬한 문화의식의 소산이라고 생각한다. 금속활자 제조 기술의 바탕이 되는 금속주화 제조는 이미 기원전 5∼6세기에 페르시아의 아케메네스 왕조에서 시작된 기술이었다. 중국에서도 기원전 3세기에 명도전(明刀錢)이라고 하는 청동 화폐를 주조한 바 있다. 그러나 전세계에서 유일하게 한국만이 이 기술을 이용하여 출판 행위를 하였다. 그 이유는 무엇인가? 당시 고려에는 글을 아는 지식인 수는 많지 않았지만, 그들은 단기간에 많은 책을 구비하여 읽고 싶었다. 기존의 목판인쇄 기술로는 그들의 독서 욕구를 충족시킬 수 없었고, 해판과 조판이 자유로운 활자인쇄방식을 고안해낸 것이다. 결국, 고려인들의 강렬한 문화적 수요가 금속활자 발명을 가능케 한 요인이라고 생각한다. 

조선조에 들어와서는 서적 간행을 위해서 임금이 직접 나서서 활자의 주조를 주도했다. 그 목적은 구텐베르크처럼 돈벌이를 위한 것이 아니라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를 위한 것이었다. 태종의 주장을 직접 들어보자. 

무릇 나라를 다스리려면 반드시 널리 전적(典籍)을 보아야 한다. 그런 뒤에야 모든 이치를 추구하고 마음을 바르게 하여 수신제가치국평천하의 효과를 이루게 되는 것이다. 한국은 중국과 바다 건너 멀리 떨어져 있어서 중국 서적을 쉽게 구할 수 없고, 또 목판본은 훼손되기 쉬우며, 또한 천하의 많은 책을 모두 간행하기 어렵다. 그러므로 내[왕, 태종]가 동활자를 주조하여, 서적을 구하는 대로 반드시 인쇄하여 널리 전파함으로써 진실로 무궁한 이익을 삼고자 한다.

이것은 권근(權近)이 쓴 <양촌집>(陽村集)의 주자발(鑄字跋)에 나오는 내용으로 금속활자 주조 당시의 상황을 알게 해 준다. 
이처럼 금속활자의 발명과 사용은 한민족의 확고한 문화의식이 발현된 것이라고 해석되는 것이다.

한글 창제와 문화강국의 터전

우리 민족의 강렬한 문화의식의 발현은 15세기의 한글 창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16세기 영국에서는 라틴어 성서가 아닌 영어 성경을 출판하거나 소지하는 사람은 화형에 처한다는 규정이 있었다. 실제로 1536년 영어 성경을 번역·출판한 윌리엄 틴들은 화형을 당했다. 

이처럼 기존에 있는 언어도 사용하지 못하게 했던 유럽의 상황과 달리, 이보다 1세기 전에 최고 권력자인 세종은 직접 하층 민중을 위한 커뮤니케이션의 도구로서 알기 쉬운 글자를 창제했으니 놀라운 혜안이 아닐 수 없다. 

한글이 나왔을 때 많은 지식인 관료들이 반대 상소를 올리고 천시했던 것은 당시로서는 당연한 일이었는지 모른다. 그러나 한글은 일반 민중들 사이에서 급속히 퍼져나갔다. 불교 서적에서 시작하여 아동 학습서, 사전, 문학작품, 실용서 등 다양한 서적들이 번역됨으로써 출판문화가 향상되고 독자층이 확대되었다. 19세기 말 개화기에 지식인들은 한글의 보급 운동을 통하여 국민계몽운동을 벌여나갔다. 일제강점기에 후기로 가면서 한국어 자체가 말살되는 위기를 맞게 되지만, 이때도 우리 문화와 한글에 대한 연구는 오히려 더 치열해졌다. 민족문화의 보존과 함께 독립에 대한 열망을 더욱 키워나갔다. 해방 이후에도 한글은 우리의 교육과 출판문화 발전에 핵심적인 역할을 해왔다. 

오늘날 한글은 21세기 디지털 시대에 적응력이 가장 뛰어난 소리글자로서, 한국이 정보기술의 강국이 되는 중요한 원동력이 되고 있다. 한글은 뜻글자인 한자와는 비교할 것도 없고 같은 소리글자인 영어 알파벳과 비교해 보아도 분명하게 드러난다. 이제 우리는 한글 창제의 정신을 본받아 자주적인 문화강국의 건설을 목표로 나아가야 한다.

조선왕조실록과 역사의식

<조선왕조실록>(이하 <실록>)은 조선 왕조의 역사적 사실을 날짜순으로 일기처럼 기록한 서적이다. 1392년 조선 왕조를 세운 태조 때부터 제25대 임금이었던 철종(1850~1863) 때까지 472년간을 매일매일 기록한 편년체 역사서다. 기록의 담당자인 사관은 매일매일 국왕과 대신들의 언행을 관찰하고 기록한다. 그 기록을 '사초'라고 하는데, 실록 편찬의 첫째 자료가 된다. 

<실록>의 전체 분량은 1,893권 888책이다. <실록>의 기사 수는 36만 2,161개로 조사되었으니, 1일 평균 2개의 기사가 실린 셈이다. 이러한 <실록>을 만든 이유는 이렇게 말할 수 있다. "왕의 언행을 기록해 역사로 남기면 왕을 후대의 평가에 묶어둘 수 있다. 후대의 평가에 왕을 묶는다는 것, 그것은 현재의 권력 남용을 견제하는 것이 된다."(이성무, <조선왕조실록 어떤 책인가> 참조)

<실록>을 보면 조선의 정치·외교는 물론 경제·사회·문화의 전 분야에 대한 상세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국왕을 중심으로 기록된 것이 분명하지만, 그 외에 국정 전반에 걸친 모든 사항이 상세하게 수록되어 있으며, 사관의 평가까지 곁들여 있다.

그러나 <실록>은 몇 가지 한계를 지닌다. 첫째, 전제주의 시대 왕조사 중심의 역사 서술이라는 점이다. 둘째, 당대사로서 한계다. 셋째, 기층 민중의 생활이 기록되기는 하지만, 객체 곧 시혜나 탄압의 대상에 불과한 것으로 인식되고 있다.

<실록>은 금속활자 또는 목활자로 된 인쇄물이라는 점에서도 그 가치를 찾을 수 있다. 동아시아 대부분의 실록은 한두 질에 그쳤으므로 필사본으로 만족했는데, 조선의 <실록>은 활자인쇄를 했고, 네 곳으로 나누어 보관했다. 이것은 실록을 영구히 보존하여 후세에 물려주기 위함이었다. 여기에서도 우리는 <실록> 간행을 주도한 조선조 관료들의 역사의식을 확인하게 된다.

세종대왕기념사업회와 민족문화추진회에서는 1968년부터 1993년까지 25년간에 걸쳐 국배판으로 <실록> 번역본 413책을 간행했다. 현재 <실록>은 홈페이지가 잘 만들어져 있어, 인터넷으로 누구나 읽고 검색할 수 있다.

대한민국의 발전과 출판문화 

우리의 20세기는 온갖 악조건과 고난을 극복하고 위대한 역사를 일구어낸 놀라운 세기이다. 20세기 초엽부터 노골화된 외세의 침탈과 국권 상실, 국토 분단, 민족상잔의 비극, 극도의 빈곤 등 최악의 시대 상황 속에서도 대한민국은 급속한 산업화를 통하여 비약적으로 경제를 발전시켰고, 학생과 시민들의 힘으로 민주주의를 이룩했다. 최근에는 드라마, 영화, 음악 등 우리의 예능이 전세계로 뻗어나가고 있다. 이것은 우리 민족 특유의 문화의식, 문화 사랑이 교육과 출판을 통하여 그 잠재력을 발휘했기 때문일 것이다. 

한반도에서 일어났던 참혹한 6·25전쟁 중에도 시민들은 피난지에서 천막교실을 세워 교육열을 더욱더 불태웠고, 출판인들도 책을 제작해 파는 일을 멈추지 않았다. 피난지에서의 서적 판매가 시민들의 호응 속에서 호황을 누렸다. 우리 문화사에서 빛나는 〈사상계〉, 〈학원〉 같은 잡지들이 창간된 것도 바로 전쟁 피난지에서였다.

21세기 한국이 경제대국이 되기 이전인 1980년대 중반, 한국의 신간도서 발행 종수는 연간 2만 종을 넘어섬으로써 세계 10위권에 드는 출판대국에 진입하였다. 도서 소비도 계속 늘어나 1980년대에 들어와서는 백만 부 이상 팔리는 밀리언셀러가 등장할 정도로 출판시장도 크게 확장되었다. 21세기에 들어와서는 이원복의 <먼 나라 이웃 나라>, 예림당의 학습만화 WHY시리즈 등처럼 천만 부 이상 팔리는 서적들이 등장했고, 이문열, 김진명, 조정래 등 자신의 저서 누적 판매부수가 천만 권이 넘는 베스트셀러 작가들도 다수 등장했다. 

한민족의 문화 사랑

책으로 보는 한국 역사를 관통하는 키워드는 우리 민족의 문화 사랑이다. 문화 사랑의 전통은 구한말 한국을 찾은 외국인의 눈에도 띄었다. 저명한 언어학자이자 역사학자였던 존슨은 한·중·일을 비교하며, 한국이 학자의 나라, 중국은 상인의 나라, 일본은 무사의 나라라는 인상을 받았다고 말했다. 즉, 한·중·일 삼국은 각각 글(文), 돈(錢), 칼(刀)을 중시했다는 이야기이다. 이 세 가지는 국가 경영의 기본이다. 한·중·일 세 나라가 오늘날 세계에서 우수한 민족으로 활약하고 있는 것도 국가의 기본을 잘 활용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논어>에서 공자는 국가 경영의 기본으로 이와 비견되는 조건을 제시한 바 있다. 즉, 군대·식량·신뢰의 세 가지이다. 국가 유지를 위하여 이 세 가지 중에 하나를 버려야 한다면, 군대이고 또 하나를 더 버린다면 식량이라고 했다. 신뢰 하나만 있으면 국가는 존립한다고 보았다. 신뢰는 바로 문화 사랑에서 나온다. 한국 역사가 바로 이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한때, 군사력이 없어 나라를 빼앗기고 굶주림 속에서 살아온 민족이지만, 민족에 대한 신념, 문화 사랑의 정신이 있었기에 한국은 오늘날 크게 발전할 수 있었다. 글의 힘, 문화의 힘을 최대한 끌어올릴 때 칼과 돈의 위력을 충분히 극복할 수 있었다는 사실을 한국 출판 역사는 우리에게 알려주고 있다.

그러나, 오늘날 우리는 한국의 상황을 아프게 성찰할 수 있어야 한다. 현재 한국의 경제력은 세계 10위, 군사력은 세계 6위를 기록하였다. <논어>에서 말하는 국가 경영의 기본인 군대와 식량 문제에서는 선진국 수준이라는 평가를 받은 셈이다. 그러나, 국민적 신뢰는 어떤가? 가짜뉴스가 횡행하고 사회적 갈등과 불신이 늘어나고 있지 않은가? 다시금 민족의식과 문화 사랑의 정신을 되찾아야 할 것이다. 이것이 <책으로 보는 한국 역사>가 우리에게 주는 교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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