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고] 삶의 미학(美學) │ 천승기 경영지도사
[기고] 삶의 미학(美學) │ 천승기 경영지도사
  • 이천설봉신문
  • 승인 2021.07.02 18: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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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승기 경영지도사
천승기 경영지도사

인간의 삶이란 나이가 들수록 잊어버려진다. 그래서 흔히 기억한 만큼 살아가고 잊어버린 만큼 죽어간다고 한다. 살러 가는 건지 죽으러 가는 건지 알 수는 없지만, 그렇게 흘러갈 수밖에 없는 것이 인간의 숙명이다. 이런 나약한 삶을 조금이나마 위로받고 기쁨을 찾던 중 고음반(S.P, 일명 유성기판)이란 기억을 통해서 과거라는 창문을 열게 되었다.

인간의 가장 귀한 악기는 사람의 음성이라고 한다. 그것이 오래된 것일수록 귀하게 들린다.

1902년 4월 11일 이탈리아 밀라노의 그랜드호텔 306호에서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 1873~1921)가 객실 안의 집음(集音) 나팔 앞에 서서 토스카 중 ‘별은 빛나건만’, ‘사랑의 묘약중 남몰래 흐르는 눈물’ 등 10여 곡의 아리아를 강하면서도 서정적으로 녹음한 것이 세계 최초로 2시간 동안 순조롭게 음반 녹음이 진행되었다고 한다. 그 뒤 1925년엔 전기방식의 78회전 S.P음반(고음반)이 주류를 이뤘다고 한다.

오늘도 이 음반들의 지지직거리는 맛깔스러운 잡음도 감수하는 수고는 나의 일상이 되었다.

1970년대 초 카투사로 미군병원에 근무하면서 미군 의사의 권유로 우리 문화의 창을 두들기게 되었다. 한국 문화와 민속품에 관심과 조예가 깊은 의사를 위해 나는 기꺼이 길 안내와 통역으로 그를 도왔다. 그러던 어느 비 오는 여름날, 한 골동품가게에 들렀는데 구석진 공간에 수북이 쌓여있는 검은 물건을 발견했다. 주인에게 문의하니 유성기판이란다.

친절하게도 주인이 태엽을 감고 판을 올려놓으니 신기하게도 소리가 난다. 난생처음 그 소리를 듣는 순간 뭔가 감전된 기분이 들었다. 라벨을 보니 오케(OKEH) 음반으로 이난영의 목포의 눈물이었다. 콧소리가 들어간 비음에다 카랑카랑한 애절한 목소리에 나는 매료되고 말았다. 가사 역시 ‘부두에 새악씨 어롱저진 옷자락’을 여미며 항구에 머물 것을 요구하는 일제하의 우리 민족의 망향가로 사랑할 수밖에 없게 되었다.

그것이 동기가 되어 1973년부터 S.P판을 모으기 시작했다. 카투사 제대 후에도 직장에 다니면서 계속 모아 내가 관리하고 감당하기 어려운 상태에서 2,000여 장을 기념으로 중복된 판을 남기고 다른 분에게 양도했다.

그 뒤 마땅한 취미를 찾던 중 미국제품 RCA회사 S.P 전용 턴테이블을 구매했는데, 쇠바늘 사용이 아니라서 판의 손상이 매우 적은 것 같고 볼륨 조정도 가능했다.

조선의 문인 유한준(1732~1811)이 쓴 김광국의 『석농화원』 발문에 의하면 “알면 곧 사랑하게 되고 사랑하면 참으로 보게 되고 볼 줄 알게 되면 모으게 되니 그것은 한갓 모으는 것이 아니다”라고 했다.

(知則爲眞愛 愛則爲眞看 看則畜之而非徒畜也 지즉위진애 애즉위진간 간즉축지이비도축야)

이는 모든 콜렉터들의 공감대이다. 나도 그런 마음으로 한 장 한 장 애써 모으다 보니 벌써 2,000여 장이 모였다.

오늘은 이래리수(본명 이음전, 1911~2009)의 ‘황성의 적(황성옛터)’과 일본 세키야 토시코(Toshik sekiya, 1904~1941)의 ‘황성의 달’을 감상해 본다. 두 음반 모두가 달과 성터를 주제로 인간의 영광과 고통 그리고 흥망의 것들을 세월의 흐름을 이길 수 없다는 공통된 생각을 의미해본다.

천승기 지도사의 작업실 모습. [제공=천승기 지도사]
천승기 경영지도사의 갤러리

그리고 내일은 일본 콜럼비아사가 한국 음반을 최초로 발매한(columbia 40000, 1929.2.26. 발매) 성악가 안기영(1900~1980)의 리골레토와뚜나 그리고 1902~1920년대 이탈리아 독무대였던 엔리코 카루소(Enrico Caruso)의 쪽판 Hosanna(음반 victrola 88403)를 감상해보면서 그 시대 우리 음악과 서양 음악을 단편적이나마 가늠해보련다.

따라서 맛있게 숙성시키려는 와인처럼 기다리는 미학(美學)이 있듯이 나도 이 음반들을 찾아다니는 즐거움을 계속하며 몸이 쇠잔하여 정지되는 그날까지 가련다.

■ 천승기 경영지도사 프로필
전) 동화은행 지점장
전) 저축은행 파산 관재인
전) 부발우체국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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