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월암 비로자나부처님과 천불 모신 적광전 상량식 거행
영월암 비로자나부처님과 천불 모신 적광전 상량식 거행
  • 이천설봉신문
  • 승인 2019.10.11 09:5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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적광전이 중건됨으로써 화엄대찰 북악사의 면모를 회복하게 되는 중요한 의미를 담아

 

이천시민의 안식처! 명산으로 손꼽히는 설봉산내에 천년고찰로 자리잡은 영월암(주지 보문스님)에 비로자나부처님과 천불을 모신 적광전 상량식이 지난 29일 보문스님과 신도들 송석준 국회의원, 엄태준이천시장 부인 남선희여사, 성수석도의원, 김일중 시의원, 최홍건 전 산업자원부 차관, 신도회장인 한영순 자유총연맹 이천시지회장, 김숙자 경기도지역신문협의회장, 손광석 한국전통문화대학 교육원 객원교수, 권기갑 교수 등 일부 내빈들이 참석한 가운데 조촐하게 진행됐다.

영월암 석조광배 연화좌대는 통일신라 말에 조성된 경기도내 가장 오래된 석조문화재이다. 그러나 1907년 설봉산 영월암을 중심으로 항일무장투쟁이 등불처럼 일어나자 일제는 200여명의 일본군을 급파하여 항일무장군인들을 소탕하고 이천지역 민가 1천여 가구를 불지르고 양민을 학살, 영월암 전체를 불태우고 불교문화재를 파괴 훼손하는 등 이천충화사건이라는 만행을 저질렀다. 그 당시 석조광배 연화좌대 위에 모셨던 비로자나부처님이 파괴 훼손, 전각도 함께 불타버렸다.

110년이 지나 지난 2016년 비로소 그 법신으로 다시 화현, 그후 320199월 지구촌평화를 기원하는 원력의 전당인 적광전을 다시 세우게 됐다.

아울러 영월암은 적광전이 중건됨으로써 화엄대찰 북악사의 면모를 회복하게 되는 중요한 의미를 담고 있다.

이천시는 삼국시대 백제와 고구려·신라가 치열하게 각축전을 벌인 한반도의 전략적 요충지로 신라 진흥왕 29(568)에는 한강유역으로 진출하는 최북단 전초기지로 남천주라는 행정관청과 남천정이라는 군사조직이 주둔한 곳이기도 하다. 통일신라시대에 이르게 되면서 전쟁의 참화를 가장 심하게 겪었다. 아울러 백성들이 겪은 오랜 전쟁의 상처를 달래기 위해 신라 문무왕의 스승인 의상대사가 북악사(北岳寺)를 창건했다고 전해지고 있다. 이후 18세기 후반(1774)에 이 절을 중창한 영월(영월) 낭규 스님의 이름을 따 영월암으로 개명 후 지금에 이르고 있다.천년의 역사를 자랑하는 이곳에 문화적 가치가 높아 잘 보존하고 지켜야 할 유산들, 유네스코 창의도시로 발돋움하면서 문화가 살아 숨 쉬는 곳으로 거듭나고 있는 이천시에 문화유산으로서도 큰 좌표가 되고있다.

영월암 삼성각 좌측에는 석조광배와 향토유적 제3호 연화대좌가 위치에 있으며 대웅전 뒤에는 10m에 육박하는 거대한 암벽을 이용해 조성된 영월암 마애여래입상이 있다. 이천시내가 훤히 내려다보이는 곳에 우뚝 서 있는 이 미륵불은 고려 초에 조성된 것으로 보물 제822호로 지정됐다.미륵불은 삼국시대 왕실에서 조성하기 시작해 고려 초와 조선 후기를 거쳐 여러 곳에 조성됐으며 수명 장수, 곡물 풍성, 살기 좋은 자연환경, 전쟁 등이 없는 평화로운 세상을 꿈꾸며 만들었다. 이천지역은 그동안 전략적 요충지로 수많은 전쟁을 겪었던 참혹한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에서 왕실이 아닌 지역민들이 스스로 조성했다.

특히 영월암 입구에 들어서면 위풍당당한 아름드리 은행나무가 우뚝 서 있다. 나옹대사가 가지고 다니던 지팡이를 꽂아 놓고 절을 떠난 후 나무가 자랐다는 전설이 전해 내려오고 있다.이 나무는 높이 37m, 둘레 5m의 일근이주(一根二柱, 한 뿌리에 2개의 나무)로 수령은 650여 년이 넘었다.

유네스코창의도시 이천시에 향토문화제가 즐비한 영월암은 사찰의 경계를 넘어 문화제로 특히 이천시민들의 희노애락을 함께하는 안식처로 전해지고 있어 이번 비로자나불과 천불이 모셔진 적광전은 선조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이천시민들에게 영원한 안식처로 더욱 큰 의미로 다가오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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