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년의 대화를 위하여
노년의 대화를 위하여
  • 이천설봉신문
  • 승인 2017.11.09 15: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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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길만
동원대학교 명예교수
문화재위원회 위원

한국은 올해 65세 이상 인구가 전국민의 14퍼센트를 넘어서서 고령사회로 진입했다. 이렇게 노년의 삶이 길어지고 있지만, 노년기에 대한 심리적 대비는 아직 부족한 실정이다. 우리나라 노인들은 대부분 외로움에 시달리고 있으며, 젊은 사람들과의 커뮤니케이션도 원활하지 못한 것 같다. 이러한 문제를 극복하기 위한 방안의 하나로 그들을 위한 효과적인 대화 방식에 관하여 살펴볼까 한다.


첫째, 대화의 적절한 분량을 지켜야 한다,
노인이고 연장자라고 해서 대화를 독점해도 안되지만, 그렇다고 조용히만 있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다. 이럴 경우 사람들은 그런 노인과 대면하기를 꺼리게 된다. 그래서 필자는 “1/N-Δ” 공식을 만들어보았다. N은 대화 모임의 참여자 수이고 Δ는 ‘아주 약간’이라는 의미를 임의로 나타내본 것이다. 예를 들어 대화 참여자가 5명이면 ‘5분의 1보다 약간 적게 말하라’는 의미이다. 이 공식은 발언의 양, 발언에 드는 시간 모두에 적용된다.


대화의 분량과 함께 말하는 방식에도 관심을 가질 필요가 있다. 일부 노인들은 길게 말하는 데다가 이야기의 흐름이 끊기지 않아, 듣는 사람들을 지루하게 할 때가 종종 있다. 발언 도중에 글의 문단을 나누듯, 말의 흐름을 멈추며 자주 쉬어줄 필요가 있다. 이것은 대화 속에 상대방이 끼어들 수 있는 여백을 만들기 위함이다. 젊은이들에 대한 배려라 할 수 있다. 여백 만들기는 민주주의 원리이다. 말할 기회, 시간, 권한 등을 구성원 모두가 고르게 갖게 하자는 것이 민주주의이다. 1인에게 집중되면 전제주의 국가이거나 독재체제가 되고 만다. 


둘째, 대화의 내용은 과거가 아니라 현재와 미래를 중심으로 해야 한다.
많은 노인들이 자신의 과거 업적, 성공담, 자랑거리 등을 내세우기 좋아하는데, 젊은이들과의 대화에서는 삼가야 한다. 꼭 전할 필요가 있을 때에는 간단히 짧게 해주고 상대방의 질문에 응답하는 정도로 끝내는 것이 좋다. 그런데, 과거 경험 중에서 실패담이나 실수에 얽힌 에피소드 등은 길지 않을 경우 사람들에게 친근감을 줄 수도 있다. 그러나, 대화 주제가 계속 과거에 머물게 되면 젊은이들과의 인격적 만남은 어려워질 것이다.


마틴 부버는 인간의 만남을 ‘나와 너’ 또는 ‘나와 그것’의 관계로 구분한다. ‘나와 너’의 관계는 서로간에 우열이나 높고낮음이 없는 인격적 만남인 반면, ‘나와 그것’의 관계는 이해관계, 소유관계, 목적관계에 얽힌 만남이라고 본다. 이것은 <논어>에 나오는 군자와 소인에 대한 비교와도 통한다. “군자는 덕을 생각하고, 소인은 토지를 생각하며, 군자는 법도를 생각하고 소인은 실리를 생각한다.” 
 

노년의 바람직한 대화 주제로는 최근 접한 지식이나 정보, 책에서 읽은 내용, 문화 예술 관련 이슈, 자신의 미래 계획 등이 있을 것이다. 고대 로마의 사상가 키케로는 “노인에게 가장 적합한 무기는 지식을 쌓고 미덕을 실천하는 것”이며, “지적인 탐구 열정은 현명하고 잘 훈련된 사람의 경우에는 나이와 더불어 자라난다.”고 주장한다. 그리고, “대화를 향한 욕구를 늘려주고, 먹을 것과 마실 것에 대한 욕망을 줄여주는 노년에 감사하고 있다.”고 말한다. 이러한 주장과 태도는 오늘날과 같은 평생학습사회에서 소중한 본보기라고 할 수 있다. 


 셋째, 대화의 상대가 되어줄 친구들을 새롭게 만들어 나가야 한다.
친구들을 과거의 우물에서만 길어오려고 하면, 나이가 들어갈수록 친구들의 숫자는 계속 줄어들게 된다. 예전의 친구 관계는 계속 유지하면서 새로운 친구들을 찾아 나서야 한다. 지적 탐구열이 있고 바람직한 대화를 즐기려는 사람들에게, 새로운 친구들을 만날 수 있는 공간은 그야말로 넓게 펼쳐져 있다. 지자체나 사회단체 또는 도서관, 박물관 등에서 운영하는 다양한 시민강좌, 취미 동호회, 봉사 모임, 여행 프로그램 등등 참으로 많다.


“너의 친구는 너의 요구가 응답된 것”이라는 칼릴 지브란의 표현처럼, 우리들의 정신적 요구가 늘어남에 따라 친구들도 자연스레 늘어나지 않겠는가. 키케로는 <우정에 관하여>(천병희 역)에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자연이 우리에게 우정을 준 것은 악덕의 동반자가 아니라 미덕의 조력자가 되라는 것이었네. 미덕은 혼자서는 최고 목표에 이를 수 없고, 다른 동반자와 결합할 때 이 목표에 도달할 수 있기 때문이지.…인간의 본성은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여 언제나 버팀목에 기댄다네, 그리고 절친한 친구야말로 최상의 버팀목이지.”


이러한 버팀목은 나이 들수록 더욱 필요해지지 않을까. 노년의 새로운 친구 사귀기는 이러한 버팀목을 구하는 것일진대, 우리 자신도 타인의 버팀목이 될 수 있다면 아름다운 노년이라고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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