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교史의 한 획을 그은 ‘장위공 서희’를 만나다
외교史의 한 획을 그은 ‘장위공 서희’를 만나다
  • 이천설봉신문
  • 승인 2017.07.13 17:18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뛰어난 협상력·빛나는 업적 남겨… 이천시를 대표하는 최고의 인물로 손꼽혀

 
  천 년 전이나 지금이나 ‘협상을 통해 맺는 국가 간에 모든 대외관계’를 일컫는 외교는 항상 있었다. 외교의 목적은 최소한의 희생으로 최대한의 국가이익을 실현하는 것이다. 조금이라도 상대방보다 더 많은 이익을 차지하기 위해 치열하게 두뇌싸움을 펼쳐야 하기 때문에 굉장히 어렵다.

 우리의 역사 중 외교 부문에서 뛰어난 능력을 선보여 우리나라 최고의 정치외교관으로 칭송받는 인물은 바로 ‘장위공 서희’이다. 이천에서 태어난 서희는 여진을 물리치고 압록강까지 확보한 전략가이자 거란의 80만 대군을 물리친 외교 협상가로 서희의 자주외교 정신은 우리나라 외교사에 큰 업적을 남겼다.

 이에 이천설봉신문은 올해 창간 16주년을 맞아 이천 시민들이 가장 존경하고 사랑하는 인물인 서희의 일대기를 살펴보면서 역사적 가치를 재조명하고, 서희의 위상을 널리 알려 올바른 역사관을 심어줄 수 있는 기회를 제공하고자 한다.

 942년 고려 초 서필의 아들로 이천에서 태어난 서희의 호는 복천이며, 이천의 젖줄인 복하천에서 글자를 따다가 지은 이름으로 추정된다. 960년(광종11) 과거에 갑과로 급제한 뒤 광평성 원외랑을 거쳐 서른 살이 되던 무렵엔 정4품인 내의성시랑이 됐다. 972년에는 10여 년 동안 외교적으로 단절되어 있던 송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되어 태조로부터 오늘날 국방부 장관에 해당하는 검교병부상서의 벼슬을 받는 등 큰 성과를 거뒀다.

 고려는 광종, 경종을 거쳐 성종이 왕위에 오르고 고려의 북진정책과 친송외교에 불안을 느낀 거란은 80만 대군을 이끈 소손녕을 내세워 ‘고려는 신라 땅에서 일어난 나라이니 거란의 소유인 고구려 땅을 내 놓으라“고 요구한다. 이 때 서희는 거란의 출병 목적이 영토 확장에 있지 않음을 간파하고 소손녕과 역사적인 외교담판을 진행했다. 서희는 고려의 북진정책이 역사적으로 타당함을 밝히고, 고려와 거란의 교빙관계를 수립하기 위해서 그 중간에 위치한 여진족을 몰아내고 옛 고구려 땅인 강동6주를 되돌려준다면 기꺼이 수교를 받아들이겠다고 협상한다. 결국 소손녕은 서희의 요구를 받아들이며 80만 대군을 철수한다.

 

 

그 후 서희는 쉴 틈도 없이 북진 개척에 나서서 994년부터 군사를 이끌고 압록강 동쪽의 여진을 몰아낸 뒤, 장흥, 귀화, 곽주, 귀주 4곳에 성과 보루를 쌓았다. 또 다음 해에도 출정길에 올라 안의, 흥화, 선주, 맹주 등 4곳의 여진족을 몰아내고 성을 쌓아 방비를 튼튼히 했다.

 이렇게 3년 동안 8곳에 성을 쌓고 북진 개척에 힘쓴 결과, 이 때부터 청천강 이북 280리에 이르는 땅이 고려의 영토로 편입됐다.

 3년 동안 북진개척에 정성을 쏟던 서희가 병이 나서 자리에 눕게 되자 성종이 몸소 행차하여 문병하면서 어의 한 벌과 말을 내렸다. 그러나 병이 점점 위독해 져서 998년 별세하니, 국장의 예를 갖춰 장사하고 시호를 장위라 했다.

 이후 서희와 소손녕의 영토 협상은 우리나라의 영토 문제를 문서로 확인한 최초의 사건으로 기록되며, 동시에 고려가 고구려의 역사를 계승했다는 사실을 국제적인 협약을 통해 확인한 사건으로 재조명됐다.

 

 
이천시는 이를 기리기 위해 매년 서희문화제를 진행하고 있다. 또한 서희테마파크안에 위치한 서희역사관은 장위공 서희의 숭고한 애국정신과 외교적 리더십을 깊이 새기며, 미래의 주역인 청소년들에게 역사 체험과 미래상을 제시하고자 전시관·영상관·체험관·추모관 등을 운영하고 있다.

 이천의 다채로운 축제 행사들로 관광객들의 발길이 이어지고 있는 가운데 집으로 돌아가기 전 한번쯤 서희테마파크에 들려서, 장위공 서희에 대해 알아보고 체험해 보는 것도 특별한 경험이 될 것이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