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한도전, 안나푸르나 트래킹… 서로 봉사하고 배려하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
무한도전, 안나푸르나 트래킹… 서로 봉사하고 배려하는 살아있는 교육의 장
  • 이천설봉신문
  • 승인 2017.02.09 15: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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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은 욕심을 버리고 겸손의 덕을 쌓으며 신의 허락을 받았을때 오를 수 있어”

 

 

정유년으로 접어든 초입에 가까운 지인들과 안나푸르나 트래킹을 다녀왔다.

일행 중 막내인 필자 또한 새로운 인생을 시작한다는 의미에서 좀 더 늦기 전에 조금은 무모한 도전을 하기로 한 것이다.
 
1월 6일, 인천공항을 출발하여 중국 상해와 곤명을 거쳐 네팔 카투만두로 들어가는 여정이었다. 인천공항에서 기대 반, 설레임 반으로 한담을 하는 중, 작년 8월부터 트래킹의 모든 일정을 준비했던 일행이 도착했다. 자. 이제 출발! 출국수속을 하는데 아뿔싸! 큰일났다.
 
팀의 총무를 맡은 분이 과거의 여권을 가지고 온 것이다. 순간 당황했지만 일행 5명은 미안함을 뒤로하고 먼저 출발하고 총무는 다음 비행기로 중국에서 만나기로 하였다.
 
다음 날 늦게 곤명공항에서 다시 만났을 때 서로 이산가족을 만난 것처럼 부둥켜안으며 반가워했다. 네팔로 향하면서 저 멀리 비행기 창밖으로 눈 덮힌 설경이 보이자 누군가 “히말라야다”라고 소리쳤다. 우리는 누구랄 것도 없이 창쪽으로 목을 빼고 바라보니 히말라야의 설경이 한 눈에 들어왔다. 살아 생전에 히말라야 산맥을 직접 본다는 것을 상상이나 했을까 싶었다. 환호하며 네팔 카투만두 공항에 내리니 우리의 70년대 어느 시골에 내려온 것처럼 빌딩은 거의 없고 소박한 모습의 도시였다. 숙소로 가는 데 도로는 거의 비포장이었고, 몇 년 전 지진으로 입은 피해를 아직 다 복구하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는 민초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다음 날 국내선으로 안나푸르나 입구인 포카라로 이동하는 데 공중에서 더욱 가까이서 펼쳐진 히말라야의 모습은 일행들의 입을 다물지 못하게 할 정도로 아름답고 웅장하고 장관이었다.
포카라에서 포터와 가이더를 섭외하고 안나푸르나 트래킹 입산 허가서를 발행 받은 후 차량으로 랜드룩까지 간 후 드디어 안나푸르나 베이스캠프를 향하여 출발! 보통 안나푸르나 트래킹은 일주일을 예상하고 4일은 올라가고 3일은 내려오는 게 일반적이었지만, 우리는 해발 2170m인 촘롱에서 1박한 후, 2920m인 Himalaya 로지에서 1박, 그리고 MBC(3700m)나 ABC(4130m) 로지에서 1박하고 되돌아 Sinuwa(2340m)와 지누단다(1760m) 로지에서 각각 1박하고 출발점으로 되돌아 올 계획이었다. 안나푸르나 6000M 이상의 봉들이 바로 앞에 보이지만 우리가 갈 수 있는 ABC 캠프까지 가는 데에도 4일을 걸어야 한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그러나 웬 걸, 오늘 숙박하기로 한 촘롱 로지를 향해 가는 데 경사가 장난이 아니었다. 계곡을 따라 내려갔다가 다시 올라가기를 여러 번… 촘롱 로지를 앞두고는 일행 중 2명에게 문제가 생겼다. 경사가 급하고 산소도 부족하여 피로가 한꺼번에 몰려온 것이다. 일행 또한 힘들기는 마찬가지.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지. 트래킹은 이제 시작이고 내 인생에서 정말 큰 마음 먹고 시작한 처음 도전이자 마지막 도전일 수도 있는 데….
 
 
 
힘들게 숙소에 도착하니 해는 서산으로 넘어가고 있었다. 허리를 펴서 석양에 물든 안나푸르나를 바라본 모습은 어떠한 미사여구를 사용하여도 표현이 부족할 만큼 장관이었고, 이 산을 찾는 모든 일행들의 피로를 풀어주기에 충분하고도 남을 정도였다.
 
다음 날 배낭을 꾸려 히말라야 로지를 향하여 출발했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일행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그런데 놀라운 것은 현지 포터들은 일행들의 무거운 배낭 3개를 등에 메고도 우리보다 걸음이 빨랐다. 우리는 무거운 배낭은 다 그들에게 맡기고 작은 배낭 하나씩만 메고도 힘들어하는데….
 
일당 17US$를 벌기 위해 수고하는 포터들에게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그런데 올라갈수록 날씨가 이상하다. 갑자기 구름이 몰려오더니 눈이 내리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네팔지역은 지금이 건기라 몇 달 동안 비 한번 안 왔다는데…. 지금 내리는 눈은 정유년을 맞이하여 제2의 인생을 시작하는 우리를 축복이라도 하는 듯 소복소복 쌓여 우리의 때묻은 과거를 정화하여 하얀 이불로 덮어주고 있었다.
 
트래킹 3일째, 오늘은 ABC캠프까지 가야 하는 데 첫날부터 힘들어 했던 두 분의 상태가 회복이 안 된다. 고도는 점점 더 높아져서 산소는 부족하고, 길은 눈길이라 미끄럽기까지 한데….
 
 
 
원래 계획했던 것은 ABC캠프에서 취침하고 새벽에 4200M까지 올라가 일출을 보기로 한 건데 결국 ABC캠프까지 가지 못하고 MBC캠프에서 멈추어야 했다.
 
정작 걱정했던 다른 일행들은 3000M이상의 등반이 처음임에도 잘 올라왔는데, 두 분은 지역사회에서 산악회장도 하고 중국의 차마고도와 매리설산, 일본의 후지산도 다녀오는 등 경험들이 많아 산이라면 누구보다 자신있어할 분들에게 일어난 일이니….
 
저녁에 차를 나누면서 자신들의 과거담을 들었을 때, 지금 이 정도로 회복된 것이 얼마나 놀랍고 기적적인 일인가 존경심마저 생겼다. 그래서 사람들을 겉모습만, 겉으로 드러난 행동만 가지고 판단하는 것이 얼마나 어리석은가를 다시한번 깨닫게 하는 기회가 되었다.
 
다음 날 새벽 4시 40분, 가이더가 문을 두드렸다. 지금 출발해서 한 시간 이상 올라가야 우리가 목표한 4200M에서 일출을 볼 수 있다는 것이다. 온기 하나 없는 방에서 덜덜 떨었던지라 힘들게 일어나 고지를 향했다. 바깥 날씨는 장난이 아니었다. 완전무장을 하여도 영하 23도에 손은 얼음장 같고 점점 더 높은 고지로 올라가는 내내 숨소리는 더욱 거칠어 져 인간의 마지막 한계를 시험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여기서 멈출 수는 없지 않은가? “도와주세요. 주님!” 내가 믿는 신에게 기도가 저절로 나왔다. 오르고 또 오르니 백색으로 덮힌 설산의 어둠이 걷히고 여명의 동이 트고 있었다.
 
어느새 고지에 다다른 것이다. 우리는 의지했던 스틱을 번쩍 들고 소리쳤다. “야. 안나푸르나다!” 드디어 해냈다는 자부심과 뿌듯함, 앞으로 나에게 주어진 제2의 인생이 어떻게 펼쳐질지라도 할 수 있다는 의지를 다지는 엄숙한 순간이었다. 그러나 꿈에서도 그리던 안나푸르나는 단순히 오르고 싶다고 해서 오를 수 있는 산은 아니다. 한 발 한 발 내디딜 때마다 욕심을 버리고, 자아를 버리고, 겸손의 덕을 쌓으며 신의 허락을 받은 때에라야 겨우 오를 수 있는 산, 그것도 발바닥으로 겨우 디딜 수 있는 산이 히말라야이고 안나푸르나다. “아. 저희들을 받아주셔서 감사합니다” 감사가 저절로 나온다.
 
소중한 시간을 영상으로 담아야 되는데 손도 얼음같이 차고, 핸드폰도 얼어서 작동이 안 된다. 간신히 동료의 도움을 받아 인증샷도 하고 영상 메시지도 녹음하는 데 추워서 말하기도, 카메라 찍기도 힘들다.
내려오는 데 발걸음이 그렇게 가벼울 수가 없다. 그런데 함께 올랐어야 할 동료 두 분이 오르지 못하고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 중 한 분은 꼬박 이틀을 본의 아니게 굶었다. 미안한 마음에 위로의 말을 건넸는데, 자신의 상황을 돌아보고 다른 사람에게 폐가 될까 염려하여 ‘산이 허락하지 않을 때, 만용을 부리지 않고 멈추는 것이 진정한 용기’라고 말하는 동행들을 보면서 이들은 과연 어떤 삶을 살아왔기에 정상을 바로 앞두고도 내려올 줄 아는가? 참으로 존경스러울 따름이었다.
 
안나푸르나를 뒤로 하고 내려오는 데 고도가 낮아지자, 두 분을 포함 일행 모두가 원기를 회복하고 얼굴에는 화색이 돌기 시작했다. 그도 그럴 것이 거의 5일은 씻는 것은 고사하고 제대로 먹지도, 잠 잘 수도 없는 환경이었다.
 
포카라로 내려와 한국 음식점에 들렀다. 한국 분들이 많이 다녀갔는지 여기저기 메모가 많았다. 삼겹살과 김치와 된장국으로 만찬을 열었는데 이게 얼마 만에 맛보는 음식인가! 음식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한 참을 먹어서 배부르고 등 따스하니 더 이상 바랄 것이 없었다.
 
귀국 전날 머무른 인도 국경 근처 호텔에서 일행 중 한 분이 백숙을 요리해 먹자는 것이다. 호텔 사장님에게 보름 가까이를 네팔 음식만 먹었더니 우리 음식이 너무 먹고 싶어 주방을 잠깐 빌려달라고 하여 빌렸다는 것이다.
 
잘 할 수 있을까? 맛은 있을까? 염려하면서 함께 시장에 나가 재료를 준비하여 직접 씻고 다듬고 잘라서 요리했다. 그런데 이게 웬일인가? 큰 닭으로 두 마리를 준비했는데, 바깥에 나갔다 온 일행들이 백숙을 맛보고는 그릇을 바닥까지 긁어가면서, 게 눈 감추듯이 먹어치우는 것이었다. 아! 뜻있는 한 분이 번거롭지만 자신의 수고를 마다하지 않고 희생함으로 일행 전체가 행복해 질 수 있다는 것, 또 한 수의 배움이고 깨달음이었다.
다음날 귀국을 위해 카투만두를 출발하여 중국 상해에서 환승을 해야 하는데 일행이 너무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예약한 티켓이 다른 분에게 발권되었다. 다행히 처음부터 트래킹을 준비하고 영어와 중국어를 자유롭게 구사하는 일행의 노력으로 대기자 6명분을 발권할 수 있는 기회를 얻었다. 그런데 이건 또 웬 일인가? 잘 발권되던 항공권이 마지막 한 명에서 끝나 버린 것이다. 비행기 탑승시간은 임박했는데 난감했다. 이 상황에서 그가 나섰다. 여행을 추진했던 자신이 함께 남아서 나중에 귀국하겠다는 것이다. 쉽지 않은 결정이었지만 그는 자신을 희생했다. 우리는 그들이 안전하게 다음 날 귀국해 만나기를 기대하면서 두 분을 뒤로 하고 한국땅을 밟았다. 남은 두 분은 매일매일 공항에서 대기표를 기다리다 3일 뒤에야 귀국했다. 그저 미안하고 고마울 뿐이었다.
 
이번 안나푸르나 트래킹은 우리 모두에게 잊을 수 없는 새로운 인생의 시작여행이었다. 나이 60이 넘어서 안나푸르나를 올랐다는 것도 의미가 있지만, 여행 내내 힘들 때마다 서로 보듬고, 때로는 봉사하고 희생하면서 상대방을 배려하는 살아있는 교육장이었다.
 
특히 트래킹 처음부터 마지막 한 명의 귀국을 위해 기꺼이 자신을 희생한 동행이 있었기에 더욱 아름답고 뜻 깊은 여행이었다. 끝까지 총무로, 인도자로 수고하신 김학성님과 신현명 박사님께 다시 한 번 감사의 인사를 드리면서, 금번 안나푸르나의 여정이 우리에게 준 교훈은 내 인생이 다하는 그날까지 사라지지 않는 아름다움의 생채기이자 훈장이 될 것이다. <글 황병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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